[노승석의 고전 여행] 이순신은 전쟁에 붓을 들었다

전쟁비망록, 《난중일기》

 

 

이순신은 무과출신의 장수이지만 어려부서부터 유학을 배워 문인적인 소양을 쌓았기 때문에 보통의 장수들에게서 볼 수 없는 남다른 문필력이 있었다. 특히 그의 서체는 중국 동진(東晉)의 왕희지 서체의 영향을 받아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매우 웅혼(雄渾)한 글씨를 썼다. 아무리 급하게 흘려도 필획이 정연하고 필법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러한 필치에서 그의 섬세하고 강인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민족의 대수난을 맞아 총이 아닌 붓을 먼저 들었다. 전쟁 상황을 기록하며 전쟁을 철저히 대비하자는 생각이었다. 전쟁 중에 그날그날의 날짜와 날씨, 진중에서 겪은 여러 가지 사실 등을 난중일기에 기록한 것이다. 물론 급박한 전쟁 중에는 간혹 쓰지 못한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평소로 돌아오면 틈나는대로 실시간 전황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남다른 정신력이 담긴 그의 필력은 어떠한 위기도 극복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일기란, 주관적인 입장에서 작성하다보니 대부분 객관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난중일기 전쟁중에 본인이 직접 체험한 역사 사실을 기록한 장점이 있다. 전통적인 문학 이론에서 말하는 일기는 매일 기록하여 자질구레한 내용들을 망라한 것이 묘미(妙味)라고 한다(문장변체(文章辨體)). 난중일기, 임진왜란 당시 발생한 여러 사건들을 망라한 진중의 종합적인 기록으로서, 정사(正史)에 기록되지 못한 내용들도 상세하게 적혀 있다. 때문에 후대에는 이러한 가치를 인정하여 난중일기를 실기문학의 백미로 평가한다.

 

난중일기는 임란당시 이순신의 활약상이 담긴 중요한 사료이므로, 후대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한 개인의 일기라기보다는 중차대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한 인간의 충혼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순신은 전쟁이라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일기를 통해 미래 앞날을 예견하며 더욱 철저히 대비할 수 있었다. 특히 여러 장수와 부하들 간의 작전 상황들을 상세히 기록하며 매번 전쟁마다 승리로 이끈 업적은 지대하다.

 

특히 정유년에 억울한 누명으로 옥살이를 하고 나와 백의종군의 처벌을 받은 신분으로 남쪽으로 가는 도중 모친 상()을 당하고 무너진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까지 악순환의 상황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정유년 413일 모친의 부음(訃音)을 듣고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 없어 후에 대강 적었다[路望慟裂, 不可盡記, 追錄草草]”고 하였다. 천붕지통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기록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순신에게 있어서난중일기는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철저히 대비하게 해준 비망(備忘) 기록이었다. 국난극복의 간절한 염원이 위기 때마다 항상 밝은 지혜로 승화되어 전쟁 승리의 묘책이 되어 주었다이것은 비단 전쟁 뿐 아니라 모든 일상생활에서도 미진보벌(迷津寶筏)과 같은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급박한 위기상황에도 항상 붓을 잡고 하루하루 자신을 점검해 나갔다. 이러한 기록정신은 계사년 웅포해전 이후에 적은 다음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항상 붓과 벼루를 생각했으나 바다와 육지에서 매우 바쁘고 또한 쉴 새가 없어서 잊어둔 지 오래였다. 여기서부터 이어 적는다[意於筆硯, 而奔忙海陸, 亦不休息, 置之忘域久矣. 承此]” -계사일기-

 


편집부 기자
작성 2018.11.15 11:27 수정 2018.11.15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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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