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채규엽의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

우리나라 남자 대중가수 1호노래




술은 언제부터 사람들의 벗이 되었을까. 술은 눈물도 되고 한숨도 되고, 또 그 한숨과 눈물을 합친 시름을 견디어 내게도 해주는데. 프랑스 보들레르(1821~1867)취하라, 언제나 너희는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거기에 있다. 유일의 문제다라고 설파하면서 술을 예찬했다. 이 술이 대중가요의 가사와 멜로디에 얽혔다. 193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남자 직업가수 채규엽의 목청에 실려서. 가락은 일본 곡, 우리말 작사자는 불명(不明)이다.

 

술이야 눈물일까 한숨이련가

이 마음의 답답함을 버릴 고장이

 

오래인 그 옛적에 그 사랑으로

밤이면 꿈에서 간절했어라

 

이 술은 눈물이냐 긴 한숨이냐

구슬프다 사랑의 버릴 곳이여

 

기억도 사라진 듯 그 이로 하여

못 잊겠단 마음을 어쩌면 졸까

 

1932년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발매(앨범번호 40300)한 이 곡은 1년 전 일본의 작곡가 고가 마사오의 곡을 번안한 것이다. 기분이 개운하지 않지만, 그때 우리나라는 나라가 아니었다. 빼앗긴 들판에 서 있는 사람들. 그래서 노래의 가락도 가사도 대한해협을 건너오는 것이 많았고, 그 당시는 그것이 현재였다. 1916년 유행한, 우리 땅에서의 최초의 번안가요라고 하는 <카츄샤의 노래>도 일본의 <훗카츠쇼카>(復活唱歌)가 원곡이다.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노래 원곡은 <사케와나미다카카다메이키카>(溜息), 1931년 고가 마사오가 곡을 지어 후지야마 이치로가 부른 곡이다. 고가 마사오는 1904년 일본 규슈 출생, 8세 때 한국으로 와서 선린상업학교(선린인터넷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69년 모교를 방문하여 기증한 시계탑이 지금도 교정에 남아 있다. 선린상고를 마친 그는 고국으로 가서 메이지대(明治大)를 졸업한 후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이 노래 <술은~>으로 엔카의 대부로 추앙 받았으며, 일본사람들에게 엔카의 고향이 조선이라는 의문(疑問)을 낳기도 했단다.

 

이 노래는 멜로디가 흐느적거리는 것이 매력이다. 물에 젖은 홑이불이 빨랫줄에 걸린 상태로 이리저리 휘적거리듯 한 곡조, 키 큰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던 단풍 든 담쟁이 넝쿨이 휘늘어져 바람결에 흩날리는 듯한 시각을 연상할 수 있는 깊은 가을 속 같은 늘어진 감흥도 멋이다. 우리말로 들을 때와 일본말로 들을 때의 감흥은 사뭇 다르다. 고가 마사오는 <아리랑>, <늴리리야> 등 우리 노래를 편곡해서 일본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기타리스트였고, 이 노래는 발매 당시 일본에서 이 음반은 28만장이나 팔렸단다.

 

1906년 함흥에서 출생하여 1949년 함흥에서 타계한 것으로 추정하는 채규엽은 성악가로 출발하여 대중가수로 삶을 살아 낸 특이한 이력의 기예인(奇藝人)이다. 그의 일본식 이름이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一郎)이다. 하세가와라는 성()은 서울에 주재하던 콜럼비아레코드 지사가 하세가와 총독의 이름을 딴 거리(지금의 소공동 근처)에 있었기 때문, 이치()로라는 이름은 한국인 남성가수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어 유행가를 불렀기 때문이란다.

 

하세가와(長谷川)라는 성은 우리민족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껄끄럽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절, 2대 조선총독이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850~1924)이다. 일본군인, 스와(周防)출생. 1886년 소장(少將)이 되어 18941895년의 청일전쟁(淸日戰爭) 때 공을 세워 남작(男爵)이 되고, 19041905년 노일전쟁(露日戰爭) 때 육군대장에 올랐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이듬해 서울에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가 설치되자, 조선주차군사령관(朝鮮駐箚軍司令官)으로 통감대리(統監代理)를 했다. 이때 주차군사령부가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다. 반도호텔, 철도호텔에서 이름이 바뀐 곳. 그때 사령관지휘소를 대관정(大觀亭)으로 붙였었다. 이후 일본제국 육군원수를 역임했고,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제2대 조선총독을 지내다가 우리민족의 3.1독립만세혁명운동 후 해직된다. 그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은 서울(소공동, 용산)에 사령부와 20사단이, 함경도 나남에 19사단이 주둔했었다. 19사단 예하부대가 만주지역을 탈약(奪掠)했다.

 

그 당시 조선주차군사령부 자리가 지금의 소공동(小公洞), 작은공주골이다. 태종임금(이방원)의 작은 딸이 살던 곳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이름이 식민지시대에는 장곡천동으로 불렸다. 하세가와 사령관의 이름에서 일본인들이 따다가 붙인 이름. 그러니 하세가와가 껄끄러울 수밖에.

 

이 노래의 소재, 술은 시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김소월의 시를 보자. ‘술은 물이외다, 물이 술이외다 / 술과 물은 사촌이외다 / 헌데 물을 마시면 정신을 깨우치지만 / 술을 마시면 몸도 정신도 다 태웁니다 / 술 마시면 취케하는 다정한 술 / 좋은 일에도 풀무가 되고 / 언짢은 일에도 매듭진 맘을 풀어주는 시원한 술 / 나의 혈관 속에 있을 때에 술은 나외다 / 되어 가는 일에 부채질하고 / 안되어 가는 일에도 부채질 합니다 / 그대여 그러면 우리 한잔 듭세 / 우리 이 일에 / 일이 되어 가도록 만 마시니 / 괜찮을 걸세가수의 술은 눈물과 한숨, 시인의 술은 풀무와 부채인가 보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든 술의 기원은 12천 년 전. 중국북부 허난 지역 신석기마을 지아후(Jiahu)에서 발견된 항아리의 흔적이 증거다.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지 발표(2004.12)에 의하면, 포도·호손열매··쌀로 만든 발효음료는 BC7000~6650년경에 생산되었단다.

유차영 선임기자

(솔깃감동스토리연구원장)

 



편집부 기자
작성 2018.11.25 18:48 수정 2018.11.2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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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