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 작가의 인명풀이] 한국인의 이름(2)

나리와 나라



지난 회에서 유리, 유라라는 이름은 [][-, -]를 붙여서 율이(유리)’율아(유라)’가 된 것이라 설명한 바 있다. [유리] [유라]와 같이 늘여서 발음하는 것을 가리켜 연진발음이라 한다. [딛다/디디다] [갖다/가지다] [일찍/일찌기] 등은 똑같은 말인데 발음만 조금 다르게 했을 뿐이다. 앞의 것은 응집(凝集)발음이고 뒤의 것은 연진(延陳)발음이다. [/터럭/터레기] [/싸락/싸라기] [숟갈/숟가락] [짚풀/지푸라기]도 응집발음과 연진발음의 차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우리 주변에는 나리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많이 있다. 순우리말 이름인데 그 뜻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마도 나리꽃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라혹은 나래라는 이름도 많다. 하지만 역시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국가를 뜻하는 말로 알고 있거나 날개를 뜻하는 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리, 나라, 나래는 사실상 같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거의 차이가 없다. [나리, 나라, 나래]는 연진발음한 것이고, 이들을 응집발음하면 모두 []로 똑같다. []을 연진발음하면서 [나리, 나라, 나래]와 같이 조금씩 다른 형태로 발현된 것이다.

 

[]은 원시어소 [/nor]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한국어 너르다는 아득한 저 원시시대에 인류가 넓은 곳을 가리키던 말 [/nor]에서 분화되어 나온 말이다. 호수를 가리키는 몽골어 노르와 평야를 가리키는 일본어 ()”도 같은 어원에서 분화된 말이다. 현대한국어 나라, 나루, 나리(=), 누리, 너르다, 넓다같은 말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나리, 나라, 나래는 마음이 한없이 넓은 사람을 뜻하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모범이 되는 사람의 뜻이기도 하다. 지난 회에서 , 유리, 유라모범, 표준, 기준이 되는 사람이라 했는데, ‘나리, 나라, 나래도 같은 의미를 지닌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원시어소 [/nor]에서 그 형태와 의미가 갈라진 것이다.

 

[/nor][, ]로 발음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 [, ][, ]로 변음되어 , 유리, 유라같은 이름이 나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지난 회에 설명한 바 있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 , , ...]의 발음 차이를 명확히 구별하지만 원시시대의 인류는 그만큼 음운개념이 발달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동일한 말인데도 [, , , ...] 등으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발음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nor][]의 형태로 굳어지고, 거기서 나라, 나리(=), 나루와 같은 한국어의 단어도 분화가 된다. 사람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을 연진발음하면서 그 미세한 음의 차이에 따라 나리, 나라, 나래와 같은 이름이 된 것이다.

 

신라 제3대 유리왕의 이름은 유리(儒理), 유례(儒禮), 노례(弩禮)’와 같은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데, 모범적인 사람을 뜻하는 순우리말 [/nyor]을 한자로 그렇게 적은 것이다. 모두 음차(音借)한 표기이다.

 

신라 제9대 눌지왕(訥祗王)의 이름에 쓰인 말더듬을 눌자이다. 고려 중기의 고승 지눌(知訥)도 그러하고, 조선중기의 문신 이안눌(李安訥)의 이름도 그러하다. 이들이 모두 말을 더듬었기 때문에 이름에다 말더듬을 눌()’자를 넣은 것일까? 아니다.

 

[/]의 발음은 쉽게 서로 넘나든다. 바로 여기서 설명하는 [/nor]을 이름에다 쓴 것이다. ‘마음이 아주 너른 사람,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리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점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게 되지만 예로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후손들도 그냥 그러한 이름을 지어 부르게 된다. 그 이름을 한자로 차자(借字)하여 적음에 있어 가장 비슷한 음을 가진 한자로 이라 적은 것이다. 이를 음차표기라 하는 바, 음차표기된 이름은 한자 본래의 뜻을 그대로 파악하려 들면 안 된다. 권율(權慄) 장군의 이름에서 이란 한자의 사전적 의미만 찾아보고는 겁이 많아 벌벌 떠는 사람이라고 파악한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을 연진발음하면 [누르]가 된다. 후금을 건국한 여진족 누르하치1000년 전 신라의 눌지왕과 별 차이가 없는 이름이다. 신라 진평왕 때의 상대등 노리부(弩里夫)”[노리]로 연진발음된 이름을 그렇게 차자한 것이다.

 

일본 인명의 노리코(のりこ)와 유리코(ゆりこ)는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노리코(のりこ)와 노부코(のぶこ)도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노리코와 노부코는 한국인들이 wide의 뜻을 가진 말 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알아야만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 이름이다. 한국어에서는 []처럼 발음하기도 하고 []처럼 발음하기도 한다. [너르] [너브]로 발음되는 한국어의 영향이 일본어에서 노리(のり) 노부(のぶ)로 나타난 것이다. 일본인들이 宣子(선자)’[노리코]라고도 하고 [노부코]라고도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연유에서다.

 

티벳이나 네팔, 파키스탄 사람들의 이름을 보면 [노르] 혹은 [누르]가 많이 있는데,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언어는 지역에 따라 크게 변하지만 인명이나 지명에 남아있는 언어의 유전자는 쉽게 변하지 않고 오래오래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티벳이나 네팔 등지에 가면 [노르부, 누르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는데, 그들도 이름의 어원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

 

[노르부, 누르부]가장 모범적인 사람, 표준 중에서도 으뜸가는 표준이란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일본의 노리오(のりお)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노리오]紀夫(기부), 典夫(전부), 範夫(범부)”같은 한자로 표기한다.

 

[노르부]를 응집발음하면 [놀부]가 된다. 한국의 놀부는 욕심쟁이란 뜻을 가진 이름도 아니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이름도 아니다. [놀부]는 원래 가장 모범이 되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좋은 이름이었으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르게 되면서 흥부를 괴롭히는 놀부의 좋지 않은 이미지 때문에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폭을 나타내는 한국어 너비나비는 사실상 같은 말이다. 현대한국어에서는 의미가 세분화되어 쓰임새에 약간의 차이를 두고 있지만 넓이, 너비, 나비는 모두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 말이고 같은 말이라 해도 무방하다.

 

나리, 나라, 나래라는 이름과 , 유리, 유라는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의미도 약간이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별 차이가 없는 이름이다. 마음이 아주 넓은 사람, 모범적인 사람이란 뜻을 가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남이(나미), 늠이(느미), 놈아(노마)“ 같은 이름도 굉장히 많았다. 역시 같은 어원 원시어소 [/nor]에서 비롯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최규성 작가 ] 계백과 김유신』『소이와 가이』『타내와 똥구디등의 인명풀이 시리즈가 있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18.12.05 16:17 수정 2018.12.05 17:18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편집부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