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1932년, 기생 세레나데

기생, 손님에서 손님으로 돌림노리개


 

기생(妓生)은 사람이고 세레나데는(serenade)는 노래인데, 이 곡은 기생들의 삶을 곡조로 튕기듯 노랫말로 엮어서 멜로디를 입힌 곡이다. 세레나데는 밤의 노래라는 의미, 소야곡(小夜曲) 또는 야상곡(夜想曲)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17~18세기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연흥(戀興)을 위한 연주곡을 말한다. 한자를 직역하면 어스름밤(작은 밤)에 부르는 노래다.

 

1932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유행소곡으로 취입되었는데, 작사자와 작곡가는 불명이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치하 22년째에 발표되었지만 창작이력기록이 사라져 버린 이런 노래들의 족보를 찾아내는 날은 언제이련가. 아래에 적은 노랫말은 <흘러간 옛 노래 사랑방>을 운영하는 부암(釜岩)님의 유성기 복각 음을 필자가 청음(聽音)하면서 필사한 가사다. 원곡 가사와 차이가 있을 수도 있으리라. 4절인데, 앞의 두 절만 적는다.

 

좋아서 불 밤을 졸며 새울까

이 목숨 맡겨 버린 그이를 위해

쓰라린 이 가슴도 어느 때 까지

행복의 날을 보듯 그 생각으로

 

행복의 그 앞날이 기대리므로

굽이굽이 슬픈 마음 웃음에 숨겨

상산 이파리 고루고루 비에 맞을 때

눈물에 속는 속을 누가 알려요

 

대한제국 봉건사회의 끝자락에 매달린 기생들의 삶을 세레나데라는 서양음악갈레에 얽으려는 시도를 한, 밝혀지지 않은 작사가의 영감(靈感)이 기발(奇拔)하다. 하지만 왠지 이 노래는 가슴이 시리다. 세레나데는 저녁음악이라는 뜻으로, 본래 옥외음악이었던 것이 연주회용으로 되었다. 이태리가 원산지, 여흥 혹은 기분전환이란 의미의 디베르띠멘또(divertimento), 노뚜르노(notturno 야상곡), 카사티온(kassation 휴식) 등으로도 불렸고, 기악에서는 녹턴(nocturne)이라고 한다.

 

말하는 꽃(말을 알아듣는 꽃), 기생들의 삶을 노래한 김선초는 1910년 원산 출생, 16세에 원산 루씨여학교를 중퇴하고 가출을 한 배우·성악가·콜럼비아레코드 전속가수다. 1931년 콜럼비아 음반에세 <아해의 무덤><애달픈 밤>으로 데뷔하여, 1932년 고가 마사오(古賀政男)<달빛 여힌 물가>, <봄각씨>, <사의 찬미>를 출반하였다. 사의 찬미는 윤심덕이 현해탄 물속으로 뛰어든 지 6년만의 리메이크다. 19341월에는 경성방송국(JODK, 京城放送局)에 출연해 김안서시의 <무심>, <봉자(峯子)의 노래> 등을 방송했다.

 

그녀는 극작가 홍해성(1893~1957)의 극예술연구회 소속으로 1930년 단성사에서 발표된 영화 모란등기(牧丹登記)에 당시 유명배우 심영·박제행·석금성·강석연·강석제·김연실 등과 출연했다. 이어서 임서방(任曙昉)의 극단 예술좌에서 전국을 순회공연을 한다. 막간가수 같은 역할을 하다가 가수로 데뷔를 한 것. 1933년 경성부 사회관에서 김선초는 영화제작자 서광제(1906~?)와 혼인을 했다. 이후 대중가수로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해방 광복 후 1949년 이면상·채규엽 등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남침했을 때 김선초는 푸른 인민군복장으로 서울에 나타나 시공관에서 연극공연에 참가했었다.

 

이 노래 발표 시기를 전후하여 기생들의 삶을 읊은 노래는 많다. <산 팔자 물 팔자>, <꼬집힌 풋사랑>, <하룻밤 풋사랑>, <평양기생>, <홍등가의 여인>, <홍도야 우지마라>, <화류춘몽>, <댄스의 순정>, <에레나가 된 순이> 등등.

 

1930년대 후반까지 장안에는 2천여 명이 넘는 기생들이 권번(기생조합)에 적을 두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이면 기생을 실은 인력거가 끊임없이 거리를 왕래하였고, 밤마다 다방골 기생촌은 푸른등을 내달았다. 기생들은 인력거의 차양을 걷어 젖히고 엷은 세모시 귀 치마가 하늘거리는 허벅지 속살을 내 비치며 남정들의 눈길을 꼬드겼다.

 

기생조직은 1905년 여악(女樂, 고려 때 들어온 당악. 다른 이름은 여공인·여령·기악여·기생·기창·기관기다. 악가무(樂歌舞)를 하는 여자, 또는 그들이 공연하는 악가무)의 폐지, 1908년 태의원(太醫院, 왕실 의무(醫務)를 주관하던 관서) 폐지, 1909년 관기제도 폐지로 이어지고,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기생들이 서울로 와서 조합형태로 진화된다. 이 조합은 1914년부터는 이름을 권번(券番)으로 바꾸어서 한성조합은 한성권번, 다동조합은 다동권번으로 불렀으며, 이 당시에 있었던 권번은 한성권번·대동권번·경천권번, 조선권번 등이 있었다. 각 권번에는 1번수·2번수·3번수 우두머리들이 있다.

 

기생은 사회계급으로는 천민에 속하지만 시()와 서()에 능한 교양인으로서 대접받는 특이한 존재였으며,‘천민의 몸, 양반의 머리라고 일컬었다. 이들은 선비들의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고 하여 해어화(解語花)라고도 칭하였다. 기생은 종류는 관기(官妓민기(民妓약방기생·상방기생이 있었고, 이들을 양성하는 학교는 가무학교ㆍ기생서재(書齋)ㆍ기생학교가 있었다. 1926년 설립된 평양기생학교(평양기생양성소)가 대표적이다. 3년 과정이었으며, 1934년 당시 1학년(가곡·서화·수신·창가·조선어·산술·국어), 2학년(우조·시조·가사·조선어·산술·음악·국어·서화·수신·창가·무용), 3학년(가사·무용·잡가·창가·일본패·조선어·국어·동서음악·서화·수신·창가) 등이었다. 이때, 2~3학년 국어 과목은 일본어일 것으로 추정하니 가슴이 답답해온다.


유차영 선임기자

(솔깃감동스토리연구원장)

 



편집부 기자
작성 2018.12.08 05:14 수정 2018.12.08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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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