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神이 빚은 雪國에 혼저옵서예

그리움으로 핀 설화


한라산을 오를 때마다 항상 가슴 설렌다. 특히 겨울 한라를 오를 때는 설렘이 두 배다. 며칠간 내린 폭설로 한라산 오르는 모든 도로가 결빙되어 입산이 통제되었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풀린다. 오늘은 돈내코를 출발하여 한라산 남벽과 서북벽을 거쳐 윗세오름을 지나 영실로 하산한다. 정상인 백록담은 오르지 못하지만 한라산 최고의 눈꽃 산행 코스다.


남벽에서 바라본 한라산 정상. 마치 사발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한라산의 다른 이름이 봉우리가 없다 해서 두무악(頭無岳), 정상이 둥굴다고 해서 원산(圓山)이라 한다.


15년간의 긴 휴식년을 끝내고 2009년 재개방된 돈내코 탐방로는 한라산 100만 명 탐방객 시대에 포화상태에 있는 탐방객의 분산효과를 갖고, 탐방로마다 다양한 특색이 있는 한라산을 보여주는 효과도 있다.


돈내코 탐방로는 친환경적인 탐방로다. 다른 탐방로보다 오르고 내리기가 상대적으로 편하다. 봄에는 참나무 꽃과 살채기도에 소나무숲이 반기고 평궤 대피소부터는 한라산 남벽의 수려한 경관을 탐방 내내 감상할 수 있으며, 최고의 철쭉 군락지와 넓은 고산지대의 희귀한 식물들, 웅장한 백록담 화구벽과 평궤에서 바라보는 서귀포 시내와 남태평양의 조망은 막힌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한라산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최고의 탐방로라 할 수 있다.

 

한라산에 오르면 겨울에도 늘 푸르게 보이는 나무가 굴거리나무다. 겨울이 되면 키높은 나무들의 이파리가 떨구어지니 햇살을 잘 받아 겨우내 광합성을 열심히 하여 그 싱그러움이 더욱 유지된다. 그 사이로 내려앉는 햇살은 수정처럼 파랗게 투명하다. 햇살의 보시. 이게 바로 무상의 보시가 아닌가.


한라에서는 겨울의 굴거리나무가 여름의 굴거리나무보다 훨씬 더 싱그러운 초록을 띠는 듯하다.


등산로를 걷다보면 눈에 파묻혀 힘겨워하는 무성한 조릿대가 가엽다. 그래서인지 바람에 댓잎 부딪치는 소리가 아름다우면서도 가슴 저미는 선율로 다가온다. 숨찬 고개를 뒤로 꺾어 걸어온 길을 내려다보면 거기에 사바는 없고 항상 새벽같이 깨어 있는 백색 숲의 이랑만 가득하다.

 

평궤대피소 인근에 이르면 비로소 밀림 속에 가렸던 하늘이 열리고 사방천지 시야가 트이면서 남태평양과 서귀포 쪽이 시원스레 조망되고 고개를 돌리면 바로 한라산 정상이 올려다 보인다. 참호처럼 만들어진 평궤대피소는 굴처럼 생긴 독특한 건축물이다. 원래 ''라는 것이 바위와 절벽으로 이루어진 푹 파인 굴이라는 뜻이다.

 

작가 오희삼은 <한라산 편지>에서 '백두산이 북녘 땅 만주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내는 곳이라면, 한라산은 망망대해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태풍을 온몸으로 껴안는 우리 국토의 파수꾼인 셈이다.'라고 두 산을 명료하게 정의 내린다.


남벽이 그 장엄한 모습으로 우리 일행에게 서서히 다가오자 소리 없는 장중한 음악이 온 설원을 뒤흔든다. 걸음을 멈추고 숨소리까지 줄여가며 황홀하게 그 모습을 바라본다. 세월에서 묵은 때, 저자에서 얻은 먼지를 여기에서 털어내며 설경의 운치를 훔친다.

 

남벽 이정표. 통제소 위로 두터운 운무가 사라지고 갑자기 하늘이 맑아지면서 산사면이 밝은 광채를 내기 시작한다.
남벽 통제소를 지나자 넓디넓은 방아오름 평원 위에 바람이 그려낸 사구처럼 생긴 눈 언덕이 펼쳐진다. 한라산에서는 바람이 기묘한 절경을 연출한다.

 

 

윗세오름 주변의 1600~1700m 고도에서 구름을 거두어 맑은 하늘을 준 것이 마치 우리의 간절한 바램을 들어준 한라산의 신령하심으로 느껴진다. 산과 나무와 풀과 숲과 자연 속의 생명을 사랑하는 우리의 작은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주신 듯하다.

 

방아오름샘에 고인 맑은 약수를 한 모금 삼키니 폐부까지 얼얼해진다. 약수 한 잔에 오롯이 살아 있음을 자각한다. 방아오름샘을 지나니 기차터널처럼 긴 눈 터널이 우리 일행을 기다린다.


눈꽃을 피운 나무 가지는 흰빛조차 무거운가. 휘어져 눈 터널이 되었다.


남벽을 지나 서북벽을 향하면서 등로 왼쪽으로 하얀 산호초로 뒤덮인 오름이 나타난다. 한라산에서 만난 자연은 한마디로 신들의 정원이다. 말없이 큰 가르침을 들려주는 자연은 또 하나의 크나큰 스승이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른 채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자연은 경전이자 성경이다.


통제소 뒤로 거대한 서북벽이 가로막고 있다. 여기서 윗세오름으로 내려서는 등로는 거의 절벽 수준으로 가파르다.


어떤 작가는 제주도와 한라산은 하나라고 말한다. 한라산이 백록담에서 뻗어내려 해안선에 이르면서 제주도라는 섬을 이룬다는 것인데, 한라산은 제주도라는 나무의 뿌리이면서 줄기라는 것이다. 결국 한라산이 제주도이며, 제주도가 한라산인 셈이다.

 

나무도 숲도 계곡도 하늘도 일체가 묵언에 들어 있다. 눈 외투를 두른 하얀 산에 눈꽃이 난무하니 그건 아마도 적멸의 꽃이다. 눈 천지 속을 누가 앞서간 흔적. 그 알 수 없는 이의 발자취가 뒷사람에게는 바로 길이 된다.


윗세오름으로 내려서는 등로 주위는 그야말로 설국이다. 이 축제에 초대받은 산사람들은 겨울의 자연이 베푸는 향연을 마음껏 즐기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윗세오름 표지석. 이곳에 내려서니 바람이 몹시 드세다. 겨울 한라에서는 바람도 풍경이다. 바람은 형체를 볼 수 없는 추상이지만, 소리 속에서 바람의 생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적 끓긴 윗세오름대피소는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다. ‘바람이 멈춘 뒤에 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노래하는 새소리로 산이 고요한 것을 안다.’라고 말씀하신 어느 스님의 반어적 법어가 생각난다. 그러나 이곳은 바람은 있으나 소리는 없다. 소리조차 얼어붙어 있다.


푹신하게 내린 눈이 한 점 새소리마저 흡입한 탓인가. 대피소 주위는 적막이 가득하다. 여기서 길은 영실과 어리목 방향으로 몸을 쪼갠다.


우리가 지나가는 선작지왓은 한없이 넓은 초원의 광야이다. 봄에는 난쟁이 산죽이 온 산을 뒤덮고 있지만 지금은 백설로 가득하다. 이곳이 바로 선작지왓이다. 선작지왓에서 '''서 있다', '작지'''을 가리키는 말이고, ''은 제주 사투리로서 ''을 이른다. 봄에는 돌 틈 사이로 피어나는 산철쭉과 털진달래가 붉게 꽃의 바다를 이루고, 여름에는 하얀 뭉게구름과 함께 녹색의 물결을 이루어 산상의 정원이라고 부른다. 여기의 작은 나무들이 가을에는 단풍을, 겨울에는 설경을 만드는 이 초원은 한라산이 자랑하고 있는 식물들의 보고다.

 

선작지왓의 초원 위로 몰아치는 눈보라로 시계는 제로이고, 온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삭풍으로 발걸음이 잠시 더디어지지만 이내 자연의 품안에서 순응하며 영실을 향해 내려간다.

 

윗세오름(1,700m)에서 영실휴게소까지 고도차는 비록 420m이지만 그리 녹녹한 코스는 아니다. 하산 길은 강풍에 날리는 얼음 알갱이 때문에 고글이 없으면 눈을 뜰 수 없는 극한 상황이다. 해발 1,600m 지점을 지나자 몰아치는 눈보라에 한라산 정상은 눈앞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등로를 가리키는 빨간 깃발만이 바람을 타고 있다. 아득한 광야에서 혹독한 자연의 시련을 겪는 노루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금방이라도 우리 눈앞에 나타날 것 같다.


설화로 핀 나목의 하얀 그리움. 기력을 다한 눈보라는 살을 에는 바람을 맞으며 헐벗은 산야를 덮어 주고 눈부시도록 하얀 눈꽃을 피운다.


 

병풍바위와 오백나한으로 둘러싸인 영실기암은 천태만상의 기암괴석들이 울창한 숲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영실기암 머리 위로 구름은 화살처럼 빨리 흐르고 기상은 급격히 나빠져 앞과 뒤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영주10경(瀛州十景) 중 으뜸인 영실기암의 설경을 대하니 소스라치는 감동으로 온몸은 전율한다.

 

 

등로 왼쪽으로 '신들의 거처'라고 불리는 거대한 병풍바위가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수직의 바위들이 절리를 이루며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것 같다. 병풍바위는 얼어붙은 비폭포와 함께 겨울의 깊은 심연 속에 잠들어있다.

 

병풍바위 아래에 깔린 연무를 헤치니 서귀포 시가지가 아련하게 보인다. 세찬 골바람이 데려오는 산 아래 번거로운 소식은 어림없다.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번거롭고, 마음이 밝으면 세상이 밝다.

쥐고 있는 것들, 다 놔버려라.


내려가야 할 길이 보이자 걸어온 지난 시간의 굽어진 길이 꿈결처럼 아련하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나. 산 공기가 벌써 소슬하다.


병풍바위를 지나서 가파른 등로를 내려서면 구상나무 숲 사이로 산죽길이 나타난다. 주목과 비슷한 구상나무 군락지는 백록담을 중심으로 하여 해발 약 1,400m 이상의 고지 8백만 평의 넓은 땅에서 자라고 있는데, 제주도 기후가 변하면서 군락지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니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펼쳐진 겹겹의 능선이 살아 움직인다. 봄이 오면 이 들판에서는 청초한 꽃을 피우는 돌매화와 들판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노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라산은 봄이면 절벽 사이로 화사하게 피어나는 철쭉꽃, 한 여름에는 비가 오고 난 후 짙은 녹음 사이로 떨어지는 폭포수, 가을에는 만산홍엽(萬山紅葉)으로 치장한 단풍으로 선경을 이룬다.

오늘은 우리에게 순백으로 단장한 기암괴석과 만개한 설화의 절경을 보여준다. 순백의 눈꽃은 봄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전령이다.

순백색 순정함으로 삶을 환기시키는 눈 산을 오르는 일은 얼마나 큰 길운인가.

 

쌓인 눈이 무심히 밝다. 순정한 백설이 너무 눈부셔 눈을 뜰 수 없다. 雪盲인가.


영실휴게소 입구를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것이 '영실 소나무 숲'인데 산림청이 주관한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그 숲이다.

 

영실휴게소 노루상.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아침 햇살에 빛나는 이슬을 머금은 넓디넓은 이 평원에서 유순한 노루의 눈망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3km의 눈길을 5시간 이상 걸으면서 신이 빚은 설국에서 천상의 설경을 원도 한도 없이 마음껏 구경했건만 내 심장으로 찾아와 그리움으로 핀 설화는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거린다.

 

천상의 설원에 봄날이 찾아와 천상의 화원으로 옷을 바꾸어 입으면 이 계절의 들꽃만이 연주할 수 있는 봄날의 향연에 다시 초대받고 싶다.

 

그리하여 흐르는 구름으로 나그네 되어 어지러운 꽃 바다의 들판에서 꽃날의 몽환에 한줌 내 영혼을 빼앗기고 싶다.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8.12.10 17:15 수정 2018.12.10 17:31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편집부기자 뉴스보기
댓글 3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최봉윤님 (2018.12.14 00:04) 
눈의꽃
기자님의 글과 사진을 읽으니 마치 한번도 가지 않은 겨울 한라산을 등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겨울 한라산을 가시는 모든분들께서 읽고 가신다면 감동이 배가 되리라 믿습니다^^ 기자님 추운 겨울 감기 조심하시고 항상 안전을 중시하며 산행하시어 좋을 글 많이많이 부탁드립니다!! (리락이님 저도 안가봤는데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등반 가실래요??)
입니다.
댓글 수정-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리락이님 (2018.12.12 14:57) 
멋진글
기자님의 글을 읽으니 겨울왕국이 떠오르네요 아름답게 내린 눈이... 나무에 얼어붙어 장관이네요^^ 기회가 된다면 겨울에 한라산 등반 꼭 해보고싶네요
입니다.
댓글 수정-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산이조아님 (2018.12.11 12:15) 
한라산
글과 사진의 매치가 절묘합니다. 울나라 설경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울나라 금수강산! 최고 경관을 보여줘서 감사드려요.
입니다.
댓글 수정-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