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칼럼] 인간과 사람





지구에는 두 종족이 존재한다. 인간이라는 종족과 사람이라는 종족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자연적 개념이다. 사람이라는 종족은 인문적 개념이다. 인간이라는 무질서와 사람이라는 질서가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 서로 대응하고 융합하며 상호작용을 한다. 인간이 물이라면 사람은 물을 담는 컵이다. 인간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관계라는 에너지다. 이 관계라는 에너지를 끊어 버리면 우리는 그저 인간이거나 사람일뿐이다.

 

관계라는 에너지를 잘못 연결하면 모든 에너지의 흐름에 장애가 생긴다. 인과율의 관계처럼 철저하게 계산적인 에너지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칙이다. 지식만 있고 지혜가 없는 인간이 넘쳐나는 것도 관계라는 에너지의 흐름에 장애가 생긴 것이다. 하드웨어만 있고 소프트웨어는 없는 인간들이 리더가 되고 있다. 인간만 있고 사람은 없는 셈이다.

 

우리는 인간이 넘쳐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사람이 부족한 세상이다. 사람이 부족한 현상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어린이집에선 아동학대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청소년들의 선망의 대상인 연예인의 자살은 이미 익숙한 소식이 되어 버렸고 비리에 연루된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다. 갑질로 지탄을 받는 대기업 회장님들의 뻔뻔한 얼굴을 보는 것도 이제 지겨운 일이 되어 버렸다.

 

사람의 가치를 실현한 간디의 일화는 유명하다. 간디가 기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신발 한 짝이 벗겨져 플랫폼 바닥에 떨어졌다. 간디는 얼른 다른 한 짝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다. 동행자가 간디의 행동에 의아해 하자 간디는 어떤 가난한 사람이 신발 한 짝만 주우면 쓸모가 없잖소?” 라고 말했다. 간디에게 인간이라는 에너지가 사람이라는 에너지보다 더 많았다면 그런 마음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에너지가 많아지면 탐욕이라는 감정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 사람이라는 에너지가 더 많아지면 차가운 이성에 매몰된다. 이 둘의 조화로운 조합이 바로 지혜와 배려와 용서와 화해의 에너지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고 부른다.

 

인간이 아마추어의 주관적 사고라면 사람은 프로의 객관적 사고다. 누구나 아마추어 시절을 겪고 지나야 프로가 될 수 있다. 아마추어 없는 프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관만 있으면 삼류소설만 있고 문학은 없는 것과 같다. 애인만 있고 부인은 없는 것과 같고 핸드폰만 있고 스마트폰은 없는 것과 같다. 객관만 있다면 예수는 없고 성경만 있는 것과 같다. 기차만 있고 레일은 없는 것과 같고 이세돌은 없고 알파고만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두발로 선다. 인간이라는 한발과 사람이라는 한발이 서로를 의지하며 선다. 두발 중에 하나만 없어도 넘어진다. 인간에 갇혀도 넘어지고 사람에 갇혀도 넘어진다. 그래서 인간과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인간이라는 에너지가 있어야 사람이라는 에너지가 성립되는 것이다. 두발로 걸을 때 자연스럽게 보폭이 맞는다. 서로 연동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에너지와 사람이라는 에너지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두 종족 중 그대는 어디에 속하는가.

 

 


전승선 기자
작성 2018.12.12 09:21 수정 2018.12.16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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