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열전 靑年 列傳] 모순의 기록, 노승희

모순일기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것, 모순.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전국 시대 초나라에 무기 상인이 있었다. 그는 시장으로 창과 방패를 팔러 나갔다. 상은 가지고 온 방패를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 방패를 보십시오. 아주 견고하여 어떤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창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여기 이 창을 보십시오. 이것의 예리함은 천하일품, 어떤 방패라도 단번에 뚫어 버립니다.” 그러자 구경꾼 중에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 예리하기 짝이 없는 창으로 그 견고하기 짝이 없는 방패를 찌르면 도대체 어찌 되는 거요?” 상인은 말문이 막혀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다가 서둘러 달아나고 말았다.

- 한비자

 

상인은 창과 방패를 동시에 팔고 싶은 욕심에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게 되었고, 결국 부끄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모순되는 것들은 그 각각으로 존재할 때는 용인되지만, 그것들을 함께 취하려고 욕심을 부리면, ‘모순적이다.’ 라며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모순적인 사람들은 어쩌면 욕심쟁이들일 것이다.

나도 욕심쟁이이자 모순덩어리다. 앞뒤가 안 맞는 것들을 모두 하고 싶은 욕심이 하루하루 쌓여간다. 돈은 벌고 싶은데 내가 하고 싶은 일들만 하고 싶고, 안정적이고 단란한 가정을 만들고도 싶은데 조금 더 자유롭고도 싶은. 나의 이런 하루하루의 모순을 기록해본다. 모순의 자기 기록, 모순 비망록, 모순 일기랄까? 20대 후반, 사회생활 2년 차인 나의 모순 일기에 담긴 이야기들은 당신의 지금, 과거 혹은 미래를 담고 있을 것이다.

 

1. ‘이야? ‘이야?

 

당시엔 내 생에 최대의 사건들이었던 초, , , 대학교 사이의 삶의 전환기. 나는 그 어떤 전환기도 쉽게 지나간 적이 없었다. 낯선 환경에서 놓인 처음 1년 동안은 공부를 하기는커녕 새로운 친구들, 선생님과의 트러블 등이 생겨나 마음이 복잡하기 일쑤였다. 어쩌면 나는 적응력이 약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대학 졸업 후 울타리 밖의 진짜 세계에 들어선 지금은 더욱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졸업 후 이상을 좇아 돈은 못 벌지만 하고 싶은 일에 뛰어 들었더니 한참 동안 갚아야 할 내 몫의 빚을 뒤늦게 알게 되는 일이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초등학생 때부터 붉은 악마가 되어 대한민국을 외쳐온 것이 부끄럽도록 나라의 썩은 구석들을 낱낱이 알게 된 사건들이 있었다. 알고 있던 세계와 실제 만나게 된 세계 사이의 괴리에 화부터 치밀어 오른다. 나의 사회에 대한 울분과 내 속에서 마주하는 혼란을 표출하면, 사람들은 세상이 원래 그렇게 힘든 거야. 적응해야지.’ 라며 터무니없는 위로를 건넨다. 하지만 꿈꾸며 발을 내디딘 세상이 이렇게 부당한 일들로 얼룩진 세상이라면 적응하고 싶지 않다고, 적응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곤 한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몰려온다. 나에게 묻는다. ‘정말 안 하는 거야? 아니면 적응하지 못 하는 걸 인정하기 싫은 거야?’ 왜 연애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나. 연애를 하는 거야? ‘하는 거야? 이러나저러나 나는 새로운 전환기에, ‘진짜 세계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는 중이다.

 

2. 오늘 하루의 망치질과 수 백 년 뒤의 성당

 

어릴 때부터 나는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이 뚜렷한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내가 뭘 잘하는지 생각해보면, 좋게 말하면 모든 걸, 나쁘게 말하면 그 어떤 것도 잘하지 못 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자기가 좋아하는 걸 찾아 미용고등학교나 요리고등학교로 진로를 정하는 친구들이 먼저 어른이 된 것처럼 멋지게 느껴졌었다.

그런 내가 운명처럼 빠진 분야가 생겼다. 오랜 시간 관심을 가진 키워드들이 총집합된 나만의 분야, 이게 바로 내가 좋아하고 지향하는 거야!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생겼다. 감사하게도 그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고 이런 나의 모습은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주변에는 좋아하는 것과 상관없는 길을 가는 친구들도 많고, 좋아하는 것이 뭔지 모르는 친구들은 더 많으니까.

나는 내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좋아하는 것을 찾은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그 길 위에 서있는 지금은 오히려 길이 없는 듯 불안하다. 나의 일은 마치 완성되는 데에 수 백 년이 걸리는 성당의 주춧돌을 놓는 인부의 작업과 비슷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당장 어떤 성과를 볼 수 있을지 막막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치 오늘의 행복보다는 미래의 행복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요새 유행하는 ‘YOLO(You live only once)와 다르게, 미래를 위한 오늘을 살고 있는 느낌. 내가 끝내 보지 못할 성당을 지으면서도 벽돌 하나를 쌓는, 조각 하나를 새기는 오늘의 과정까지도 사랑할 수 있을까? 그새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미래의 어느 날, 내가 여태껏 해왔던 것들이 휴지쪼가리처럼 쓸모없어지면 어쩌지? 이렇게 확신 없이 비틀대는 하루들이 쌓여간다.

 

3. 자연스러움을 규정하다.

 

나는 자연스러움을 지향한다. 분야를 막론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답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세상에는 인위적인 것이 너무나 많고 어떤 것이 자연스럽다에 대한 논란도 많다. 모든 건 규정하기 나름이니까.

 

우리 집에는 한 살이 지나 생리를 두 번 한, 꼬리와 네 발 달린 가족 콩이가 있다. 콩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가면 항상 듣는 말은 중성화 수술 얘기. 중성화 수술은 상식이고, 최대한 어릴 때 해줘야 한다며 아직 수술을 해주지 않은 무식한 반려인인 듯 말한다. 있을 지 모를 병의 예방을 위해 생식기관을 미리 제거하라는 것인데, 그 어떤 동물, 그리고 그 어떤 몸의 기관도 쓸모없는 것이 있을 리 없다. 자연 상태의 몸의 일부를 인위적으로 없앤다면 그에 따른 부작용이 분명 있지 않을까? 더 이상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번식활동을 하며 살지 못하는 개들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까, 중성화 수술에 대한 고민을 끝내지 못했다.

한편 동물병원에서 반려견 사료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개들은 본래 육식 동물인 늑대의 후손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기가 듬뿍 들어간 고단백질 사료를 주어야 한다고. 콩이에게 육식 위주의 사료를 주기 시작하면서, 채식을 지향하는 나에게도 혼란이 생겼다. 원숭이를 비롯한 영장류는 본래 잡식이니 사람이 채식만 하는 건 자연스럽지 않은 것 아닐까? 자연스러움 = 건강이라는 전제로 만들어지는 모순들에 혼란스럽다.

 

자연스러움은 정상이라는 개념과 결합되어 강요되기도 한다. 볼트와 너트, 혹은 퍼즐 조각의 꼭 맞는 합처럼 생긴 남녀의 생식기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두 개의 성별만이 존재한다고, 그리고 그것들의 결합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 같다. 그리고 분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정상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자신이 남녀의 사회적 성 구분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들, 같은 성과의 사랑을 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존재한다면, 그 또한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정상비정상’, 이처럼 인위적인 개념이라니. 자연스러움은 규정되고 강요되는 순간 자연스러움과 멀어진다. 다양한 존재들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 자연스러움의 의미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4. 통제와 지탱의 경계

 

나는 누군가에 의해 내 삶이 통제되는 것을 못 견딘다. 내가 보살펴야 하는 형제라도 있으면 익숙했을 텐데, 반대로 보살핌을 받는 것에 익숙했던 외동의 삶이었기 때문일까? 28, 슬슬 압박이 들어오고 있는 결혼을 생각해보자. 사랑하는 사람과 인생을 함께 하는 동반자가 되는 것은 반갑지만, 결혼으로 인해 내 삶이 통제되는 것은 아직 참 두렵다. 무엇보다 한번 낳으면 죽을 때까지 책임져야 하고 내 삶을 송두리째 통제할 존재인 아이에 대한 두려움이 많다.

 

외동인 내가 지금에서야 콩이를 동생 혹은 내 아이처럼 돌보면서 통제의 새로운 맛을 느끼고 있다. 내가 없이는 밥도 먹지 못하는 생명을 위해서 때맞춰 밥을 주고, 산책을 시키고, 그걸 위해서 외박도 맘 편히 못 하는 요즘. 행복한 불편이란 이런 걸까? 생각한다. 통제의 고통보다는 존재와의 밀착감이 점점 더 큰 기쁨이 되는 것은 내가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일까? 내 삶을 통제하는 존재들이 내 삶이 풍요롭게 지탱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본다.

 

5. , , 삶의 일치

어느 기사의 맨 아래쪽, 기자의 이름 뒤에 그가 지향하는, 그래서 그를 설명해주는 짧은 문구가 눈에 띄었다. ‘말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글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글 그리고 삶이 일치한다는 것. 사회에 나와 보니 일치가 얼마나 드문 경우인지 알게 되었다. 떠들어대는 말과 그들이 진짜 살아가는 삶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어른들이 어찌나 많던지. 좋은 일을 한다는 곳일수록 그 분리와 불일치가 더한 이 모순. 지향하는 것과 행동이 불일치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신념과 삶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위선적이다.

 

부끄럽고 위선적인 어른이 되고 싶지 않기에, 내 속의 모순들을 하나하나 헤아리고, 헤집고, 깊이 파고들어 나의 말, , 삶이 통하는 길을 만들고 싶다. 지금으로부터 10년 뒤, 불혹不惑의 나이에 가까워지면 내 속의 수많은 모순이 피워낸 길속에서 온전한 나를 만나게 될까? 어떤 이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거대한 모순이라며, 이 모순을 비웃고, 울고 웃을 수 있는 것이 유머라던데. 살아있는 한 벗어날 수 없는 모순, 나의 모순 일기는 계속될 것이다.

 

 

 

 


전명희 기자
작성 2018.12.19 11:28 수정 2018.12.1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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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