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눈 위에 핀 다섯 꽃송이, 중국 화산(华山)

눈 덮인 화산의 주봉에서 우화등선하다



화산(华山)은 중국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으로 정상의 다섯 봉우리'다섯 꽃송이'에 비유하여 붙인 이름이다. 무협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화산파의 본산인 화산은 섬서성 성도인 서안(西安)에서 동쪽으로 약 120km 떨어진 화인시(华阴市)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에는 전국시대 이후 도교(道敎) 오행사상(五行思想)의 영향을 받아 산악신앙인 5(五岳)의 관념이 생기게 되는데 동쪽의 태산(泰山), 서쪽의 화산(華山), 남쪽의 형산(衡山), 북쪽의 항산(恒山), 중부의 숭산(嵩山)에서 제사를 지내왔다.

 

동봉, 서봉, 남봉, 북봉, 중봉 다섯 개의 주봉 중 가장 높은 것은 남봉(2,154m)이며, 36개의 작은 봉우리들이 주봉을 호위하고 있다.



며칠 동안 서안과 화산 일대에 폭설이 내려 화산 출입이 통제되는 바람에 서안에서 마음만 졸이고 있었는데, 오늘 입산이 허용되어 아침 일찍 서안을 출발해서 1시간 반 걸려 화산 입구에 도착한다. 그러나 산정에 잔설이 많아 잔도가 미끄러워 북봉 케이블카만 운행한다는 소식에 일행은 아연실색한다. 며칠을 기다렸는데 원래 오르기로 했던 서봉과 나머지 봉우리들은 멀리서 바라만 봐야하는 반쪽짜리 산행이 되는 바람에 상심이 크다.

 

서봉인 연화봉(蓮花峯)을 본떠 만든 화산 입구의 연꽃 조형물.

 

화산 트레킹은 보통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서봉까지 오른 후 정상인 남봉을 거쳐 동봉, 중봉,북봉까지 총 10km 구간을 6시간 정도 걷고 북봉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하는 코스로 진행된다. 오늘은 천재지변 때문에 북봉(1,614.9m)만 올라가니 아쉬움이 커지만 이 또한 자연의 섭리이려니 생각하고 마음을 내려놓는다.

 

어제까지 폭설이 내린데다 시간이 이른 탓인지 매표소 부근에는 탐방객이 별로 없다. 매표소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이동한다.

 

셔틀버스 차창 밖은 온통 화강암 덩어리의 바위산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용이 꿈틀거리듯 맺히고 이어진 거친 산세의 협한 유곡(幽谷) 사이에 난 구절양장의 가파른 비탈을 넘는 셔틀버스 엔진소리마저 숨이 찬다.



초입부터 눈으로 치장한 거벽은 산객을 덮칠 듯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차안의 산객들은 어느 순간부터 말을 잃었다.

 

북봉 케이블카 탑승장에 도착하여 6인승 케이블카를 타고 깊은 골짜기 사이를 올라간다. 북봉 아래 하얗고 높은 봉우리가 도열해 있는 모습은 웅장하고 경이로운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펼쳐 놓은 듯하다.


북봉을 오르는 케이블카. 며칠간 내린 눈이 한 점 새소리마저 흡입한 탓인가. 계곡은 적막이 가득하다.
케이블카 승차장 뒤로 잠시 뒤에 오를 북봉이 보인다. 이런 산을 보면 마치 선지식(善知識)을 알현하는 것과 같다.

 

아침 햇살이 준령들을 비출 때 겹겹의 능선이 살아 움직이니 그 감흥이 다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장중한 자연의 침묵하는 교향악을 듣는다. 간간히 보이는 벌거벗은 나무는 부드러운 질감으로 산의 두께를 느끼게 해준다. 햇살이 넘치는 북봉은 빛으로 환하고 맞은편 봉우리들은 산 그림자로 그윽하다.


거대한 암괴로 이루어진 백악의 산은 순백색 순정함으로 순례자를 맞이하듯 우리를 반긴다.



북봉을 오르는 절벽에서 만나는 사원들은 가장 수려한 자리에 위치하였으니 명당이다. 트이면 시원스런 눈맛이 좋고 막히면 아늑한 운치가 좋다. 도교 성지인 화산에는 기원전 2세기에 서봉묘(西峰庙)라는 도교 사원이 있었다. 특히 근처 서안은 중국 최초로 중원을 통일했던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이 있던 곳으로, 신선들의 술법인 신선방술(神仙方術)을 좋아했던 진시황이 산동(山東)과 발해(渤海) 연안에서 신선술법을 닦던 방사(方士)들을 대거 불러들여 신선방술이 중국 전역으로 보급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어서 화산도 이때부터 도교의 영향을 받게 된다.


도교사원 도룡묘의 옥황상제. 하늘 아래 첫 동네 좁은 암반 위에는 곳곳에 도교사원들이 있다.


화산은 남으로 진령을 의지하고 북으로 위하평원과 황하를 굽어보며 대서북이 중원을 출입하는 관문을 지키고 있고, 중화민족 문화발상지 중의 하나로서 '중화'(中華)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북봉 능선에서 바라본 화산 주봉들. 좌로부터 동봉, 중봉, 남봉, 서봉이고 바로 아래는 도교사원과 산장이다. 바위 꼭대기에 실 같은 길이 나 있다.

 

 

이윽고 북봉 정상에 도착한다. 화산은 전체가 바위로 된 기묘한 산이다. 협곡이 워낙 깊고 험해 산짐승은 물론이고 산새도 함부로 날아다니지 못하고 구름을 탄 신선들이나 노닐만한 곳이다. 이곳에 서면 두 눈에 모조리 쓸어 담기 부족한 산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구름이 물러간 화산의 여기저기에 햇볕이 내리쪼이니 마치 개화를 기다리는 꽃봉오리처럼 다섯 봉우리가 화려하게 피어난다. 풍경이 생사를 초탈하니 실눈을 하지 않으면 감히 바라볼 수 없는 광휘로운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북봉 정상(1,614m). 들쑥날쑥한 기암의 흰 바위들이 병풍처럼 산세를 꾸렸다. 잔설이 내려앉은 구부러지고 휘어진 소나무 줄기와 가지에는 만고풍상이 걸려 있는 듯하다.


사람들이 암릉 위에 만든 돌계단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그 길은 결코 따로 놀지 않는다. 원래 거기에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친화적이다.

 

화산의 깊은 골짜기 곡저까지는 수직바위 길, 공중에 매달린 채 오직 계단 난관에 의지해 걸어간다. 절벽 끄트머리에 달라붙은 계단을 따라 오르고 내려서야 한다. 잠시 고개만 내밀면 수백낭떠러지가 펼쳐져 등골이 오싹해진다.


직벽 계단 길은 기상이 악화되거나 눈이 내릴 때는 통제된다.


북봉에서 내려오니 삼거리에 있는 매점이 산객을 기다린다. 이곳에서 뜨거운 커피 한잔을 마시니 마음속의 삼독(三毒)이 사라지는 듯하다. 마음이 청산이면 거기가 무문관이다.


북봉 삼거리 매점. 하산하는 케이블카를 같이 타고 내려간 처녀가 서안에서 직장 생활하는 이 집 딸이었다.


매점에서 잠시 쉬었다가 중봉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화산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형성된 험준한 산세를 자랑한다. 덕분에 각종 무협 영화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데 어린 시절 무협지를 즐겨 읽었던 세대들은 한번쯤 들어봤을 화산파의 배경이기도 하다. 특히 무협 소설계의 대가 김용(金庸)'사조영웅전'에 나오는 화산논검(華山論劍)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등의 작품으로 우리나라와 동아시아권에 선풍적 인기를 일으키며 무협소설의 근간을 개척한 김용이 작년 10월 사망함에 따라 양우생, 고룡과 함께 무협소설의 세 거두가 모두 사라졌다. 강호제현(江湖諸賢) 모두 아쉬워할 만한 소식이다.

 

김용의 화산논검 기념비. 뒤에 보이는 봉우리가 조금 전에 올랐던 북봉이다.



오늘 화산 산행은 여기까지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면서 종주를 하지 못한 아쉬움의 여운도, 마음속의 번뇌도 다 털어낸다. 산을 내려오니 화산 자락은 벌써 어둠이 내려앉는다.


기척 없이 불어온 한 줄기 미풍이 이마를 스쳐간다.


케이블카 하차장. 산자락은 이미 산그늘이 접혀 먹물이 번진 듯 수묵호처럼 변해 있다.


자연은 형용하기 힘든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어 자연 앞에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왜소해진다. 인간의 힘이라고는 터럭조차 가감되지 않은 하늘을 찌르는 화산의 고봉들이 내뿜는 초월된 힘을 몸속 깊숙이 느끼게 되면 미혹(迷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자연과 조용하게 동화된 산문, 신선이 놀던 다섯 주봉, 번뇌조차 먼지처럼 사라져 버린 유곡에서 잠시 신선이 되어 즐긴 하루.

 

이것이 바로 우화등선(羽化登仙) 아니던가.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9.01.07 11:10 수정 2019.01.07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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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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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조아님 (2019.01.08 09:09) 
화산
평소 무협소설을 좋아하는데 김용작가가 작고하셨군요. 어릴적부터 엄청 많이 읽었는데. 화산논검의 현장을 보니 너무 감동입니다. 기사 잘읽었습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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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귀요미님 (2019.01.08 09:03) 
화산
화산 설경 너무 멋집니다. 오악 중 하나인 태산은 다녀왔는데 화산에 꼭 가고싶어요. 서안은 보너스로. ㅎㅎ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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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