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입춘(立春)이다. 이미 들어선 봄을 읽는다.
봄날같이 포근한 겨울날 새벽, 그 유명한 월출산 천황봉의 보름달은 수줍음 타는 영암 새색시인양 몸을 감춘다. 그 바람에 월출산 국립공원 주차장은 숱한 잔별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지 이미 오래다.
헤드랜턴에 불 밝히고 공원 주차장의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로질러 산행을 시작한다. 어둠의 심연에 잠긴 천황사를 지나 사위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바람골을 따라 40여분 걷다 보니 짙은 어둠을 헤치고 동녘 하늘에서 조금씩 하늘이 열리기 시작한다.
서서히 다가오는 새벽하늘 아래로 폭 1m, 52m 길이의 구름다리가 120m 높이의 창공을 가르며 우리 눈앞에 위용을 드러낸다. 이 다리가 시루봉과 매봉을 잇는 가교다.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구름다리 아래로 바람폭포 가는 철제 계단이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낸다.
구름다리를 건너면 좌로 매봉, 우로 사자봉이 거대한 슬랩으로 우리 앞을 가로 막는다. 매봉과 사자봉 사이 계곡으로 한참을 하산했다가 다시 열심히 치고 올라야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설 수 있다.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을 오르는 사이에 동이 터기 시작한다.
월출산에 와서 월출을 봐야 하는데 장엄한 일출이라니.
마루금에 올라서니 좌측에서 올라오는 땅끝기맥과 만난다. 월출산 바위는 모두 맥반석이다. 수고하며 땀 흘리는 산행객에게 그 좋은 기운을 듬뿍 나눠준다. 한갓 바위조차도 베풂에 익숙한 남도 인심을 닮았나 보다.
실낱같이 가느다란 계곡은 경포대(鏡布臺) 삼거리를 지나며 넓어진다. 이어 경포대는 월출산 남쪽 계곡에 크고 작은 기암괴석이 맑은 물 속에 잠겨 있고, 동백 숲, 비자나무, 소나무, 단풍 이파리들이 함께 어울려 절경을 연출하는 명승지다.
통천문을 지나자 월출산 최고봉인 천황봉(809m)이 나타난다. 300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을 만큼 크고 평평한 바위로 이루어진 천황봉 정상은 밖에서 보는 월출산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인 이미지이다. 그래서 뾰족함과 평평함, 음과 양 양면을 다 지닌 월출산은 부조화마저 오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멀리서 보면 악산 같고 가까이서 보거나 품안에 들어서면 어머니처럼 정 깊은 산이다.
천황봉은 항상 안개 속에 가려 신비스러움을 간직해야 제 맛인데 오늘 만큼은 희디 흰 자기 속살을 다 드러내고 있다. 윤선도가 ‘월출산 높더니만 미운 것이 안개로다’라고 읊었는데, 오늘은 윤선도 시조가 통하지 않는 날이다.
월출산 아래 마을들은 동네 이름조차 천년의 세월을 버리지 못했다. 월곡리, 월남리, 월하리, 월봉리... 수백 수천 년을 흙 내음 속에 살다간 민초와 도공들의 체취가 오롯이 살아 있는 그네들이 마을 이름 첫머리에 달의 이름을 빌린 것은 차라리 필연일지도 모른다.
천황봉 정상에서 흘러내리는 바위 능선들이 한 폭의 그림이다. 바위에 걸린 소나무는 어떻게 저런 곳에서 자라고 있는 지 신기하기만 하다. ‘월출산 천황봉에 둥근 달이 뜬다’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한참을 내려와서, 조금 전에 올랐던 천황봉을 뒤돌아본다.
언제 ‘달뜨는 밤’에 월출산을 다시 찾아와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이 산을 노래하고 싶다.
둥근 달이 뜨는 밤
온 몸을 드러내고
너는 환한 웃음으로
사랑의 밀회를 즐긴다
어느 조각가가 감히 이토록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 것이며, 어느 위대한 화가가 이렇듯 아름다운 명화를 그릴 것인가? 수많은 봉우리들이 기치창검을 두른 듯 높이 솟아 있고, 갖가지 기암괴석은 자연의 오묘한 조화 속에 그 위용을 서로 시샘하듯 자랑하고 있다.
호남의 소금강산, 월출산의 절경은 안개와 바람의 합작품이다. 안개가 바람을 타고 회오리치며 흘러가는 틈새로 하늘을 뚫고 우뚝 솟은 암봉들이 잠깐 잠깐 신비한 모습을 보여준다. 월출산 바위들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기도 하고 송곳처럼 날카롭기도 해 위압감을 느끼게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나지 않은 바위들이 차곡차곡 쌓여 기기묘묘한 형상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바람재를 지나 먼저 구정봉으로 오른다. 구정봉은 사람 얼굴 형상을 하고 있는 영암판 큰 바위 얼굴이다. 봉우리 아래에 있는 베틀굴을 지나야 구정봉에 오를 수 있다.
뾰족한 봉우리의 연속이 마치 도봉산의 만장봉, 자운봉 줄기 같다는 인상을 받곤 하는데 그 옛날 다산 정약용이 강진 땅으로 유배 가던 길에 여기를 지나며 쓴 시가 바로 이러하다.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 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월출산은 향로봉까지가 남성미를 뽐내는 험준한 바위길이라면 미왕재에서 도갑사에 이르는 내리막길은 어머니의 품같이 포근한 흙길이다. 계곡을 따라 동백나무 꽃잎을 밟으며 하산하는 꽃길이 그렇게 정겹고 아름다울 수가 없다.
겨울이지만 산색은 만화방창(萬化方暢) 봄날처럼 푸르다. 낙엽수들은 나목으로 서 있지만 동백, 굴거리 등 상록수들이 산자락을 푸른 보자기처럼 덮고 있다.
구정봉에서 억새밭이 있는 미왕재로 가는 길에 도갑사가 어렴풋이 보인다.
날머리의 도갑사(道岬寺)는 월출산 남쪽의 도갑산 자락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 문수신앙의 발상지로, 통일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세운 절이다.
영암은 백제의 왕인박사와 신라말 도선국사, 그리고 근래에는 시인 김영랑을 배출시킨 곳이기도 하다.
도갑사의 정취는 아침나절 산안개가 걷힐 때 가장 아름답다.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도갑사 경내로 들어서면 한적하고 소담스런 분위기가 운치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조용한 산사들이 너나없이 장대하게 보이려고 허장성세의 불사가 유행하니 한편으로 허전하고 서글픈 마음이다.
암자의 가난하고 시린 풍경은 그리운 옛 애인 만나듯 가슴 설레게 만드는데.
오층석탑 뒤로 야트막한 축대 위에 자리한 대웅보전은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을 연상시키는 규모가 크고 위풍당당한 전각이다.
월출산은 묘하게도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산이다.
한 걸음 후에 뒤돌아 본 모습과 두 걸음 지나 뒤돌아 보는 풍경이 사뭇 다른 감흥으로 다가온다.
지나온 길이지만 미답(未踏)의 공간처럼 느껴지고, 그 속에서 상상의 여백을 넓혀주는 산이다.
그래서 산행 내내 눈과 귀와 마음을 열어놓지 않으면 보고도 못 보는 ‘느낌의 산’이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