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전선야곡

6.25전쟁, 60만 대군 보초노래

유호·박시춘·신세영

 



지금부터 꼭 66년 전, 1953727일은 6.25전쟁 31개월 1129일간의 전쟁이 휴전(休戰)된 날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었지만, 서로는 스스로 전쟁에서 승리를 했다고 저마다 기념하고 있다. 요즈음은 이에 대한 후속으로 평화협정이니, 종전선언을 화두로 설왕설래하고 있다. 19516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전쟁발발 3일 만에 서울을 공산군에게 빼앗긴다. 이어서 36일 동안, 여름날 장맛비 홍수의 급물살에 쓸리 듯 낙동강까지 밀린다. 그곳에서 195081일부터 915일까지 형산강·금호강·낙동강을 연하는 방어 작전을 수행한다. 작전 명칭은 <Stand or Die>. 죽느냐 사느냐.

 

이 수세적인 방어 작전을 공격으로 반전시킨 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이다. 작전 명칭, 광물질 이름 크로마이트. 이로 인하여 반격 13일 만에 다시 서울을 되찾고 북진공격을 하여 그해 1226일 압록강 까지 진격한다. 이때 불현 듯 나타난, 민머리에 꽹과리를 두드리며 공격해 온 중공군 인민의용군. 이에 밀린 후퇴작전이 19511.4후퇴다. 서울을 다시 빼앗긴 날. 그 해 311, 평택·장호원·삼척을 동서로 연하는 선까지 후퇴한 국군과 UN군이 다시 북진하여 610일을 전후하여 철원·평강·김화까지 진출한다. 이때 UN에 파견된 소련 측 대표 야코프 말리크(Yakov Aleksandrovich Malik. 1906~1980)의 휴전협정 제안으로 195178일부터 1953727일까지 지난(持難)한 협정, 정규회합 159회와 수시회합 500여회로 이어간다. 테이블 위에서는 협상, 휴전선을 마주한 전선에서는 고지전투가 치열했다. 이 휴전협정 기간 동안을 묘사한 노래가 바로 <전선야곡>이다. 이 곡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발표된 60만 대군의 불멸의 보초가(步哨歌)이며, 당시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을 그리면서 전쟁터에서 장병들이 군가보다 더 많이 부른 전쟁가요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 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 그 목소리 그리워//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안수 받쳐놓고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 쓸어안고 싶었소.(가사 전문)


https://youtu.be/ZjjqCRGZXgI

 

이 노래는 1951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에서 박시춘이 <전선야곡>이란 제목으로 곡을 구상하면서 작사가 유호에게 노랫말을 부탁하여 만든 가사다. 여기에 구성지고 구슬픈 박시춘의 멜로디로 가락의 옷을 입힌다. 이때 오리엔트레코드 사장 이병주가 찾아가서 남인수를 연상하면서 곡을 쓰고 있는 박시춘에게 신세영을 추천한다. 이리하여 절창 <전선야곡>이 신세영의 입을 통하여 세상에 울려 퍼진다. 당시 25세 본명 정정수, 신세영은 1926년 동래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해방 직전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만주 봉천을 거치면서 전투에 투입되었단다. 그러던 중 B-29기의 폭격을 받아 피투성이로 병원에 이송되었다가 일본의 패망소식을 접하고 귀국하였단다. 이후 1947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리엔트레코드 주최 콩쿨에서 입상한 뒤 전속가수가 된다.

 

예명 신세영은, 당시 유명가수였던 신카나리아, 장세정, 이난영의 이름을 신((()한 획씩 따서 붙인 것이다. 이후 1948<로맨스 항로>로 데뷔하였으며, 이는 해방 이후 현인·남인수에 이어 등록한 대중가수다. 이후 1951년 이 노래를 받아 취입한 날, 그의 어머니가 운명하셨다. 정정수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는 민족의 애환시기에 가요사의 명맥을 이어온 예인이며, 노래를 통하여 민초들의 애환을 달래준 별이었다. 그는 198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2004년에 영구 귀국하여 2010823, 향년 84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2010년은 유난히도 연예인 큰 별이 많이 진다. 코미디언 배삼룡, 원로 작곡가 박춘석, 원맨쇼 맨 백남봉, 가수 백설희 등이 하늘의 별이 되었다. 신세영(정정수)은 가수 태일(정태진)의 아버지다.

 

작곡가 박시춘은 본명이 박순동이다. 시춘(是春)은 언제나 봄날, 늘봄이라는 의미로서 1930년을 전후하여 서울 아리랑가무단 멤버로 활동을 할 당시 이 악단의 연출 홍개명(영화감독)이 지어준 예명이다. 그는 19131028일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박남포(본명, 박원거)는 밀양에서 기생을 양성하는 권번(卷番)을 운영하였고,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당대의 명창 송만갑·이동백·김창룡·이화중선 등의 창()과 노랫가락, 판소리 속에서 철이 들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의 타계로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밑바닥을 거쳤지만, 끝내 자신의 끼를 살려내 우리나라 대중가요 작곡의 전설이 되었다. 그가 남긴 대표 작곡들은 <애수의 소야곡>, <가거라 38>, <비 내리는 고모령>, <신라의 달밤>, <낭랑 십팔세>,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이다. 그의 부인은 여수우체국 근무원이던 김예비(현숙), 1940년에 결혼하여 슬하에 6남매를 두었다. 밀양연예협회 자문위원 오태환의 <박시춘의 생애와 조명>에 밝힌 이력이다. 1996630, 향년 84세로 이승을 등진 그에게는 친일논란(親日論難)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태평양전쟁시기 지원병 참전을 독려한 <혈서지원>,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안해>, <목단강 편지> 등의 작곡들. 이 가운데 조명암이 작사한 <혈서지원>은 손가락을 깨물어 낸 피로 혈서를 쓴다는 가사를 담고 있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19.07.02 10:23 수정 2019.07.02 13:28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편집부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