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기행] 문수산 축서사

전승선




문수산 축서사

 

 

 

 

쉬고, 쉬고 또 쉬고

 

만나고 싶었다.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더해질수록 만남은 쉽지 않았다. 마침, 지인으로부터 스님의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나는 스님을 만나기라도 한 듯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가슴이 뛰었다. 심장소리가 쿵쿵 머릿속을 걸어 다니며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해만 갔다. 진정한 스승 없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얼마나 불행한가. 그 불행의 근거가 마음을 끌고 가는 사유의 부재라 해도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밥벌이 보다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한 생애의 진실이 삶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다. 연민은 더욱 아니다. 가난하고 고독한 육신의 고통이 아니라 다만, 몸속의 살아있는 희망일 것이다. 몸이라는 우주에게 희망이라는 마음을 심어주는 스승을 그리워한 나는 그래서 축서사 무여 스님께로 가 닿고 싶었다. 책속에서 만난 스님은 내게 나직이 말한다. 쉬고, 쉬고 또 쉬라고.

 

작년 사월, 드디어 조계사에서 무여 스님을 만났다. 축서사가 아닌 우리 동네 조계사에서 스님을 처음 뵐 수 있었다. 무여 스님의 법문이 막 시작될 무렵 나는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겨우 도착했다. 사람들은 이미 조계사 마당을 가득 메우고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맨 뒤에서 발뒤꿈치를 들고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나는 못된 버릇이 하나 있는데 스님들의 법문을 들을 때마다 집중이 되지 않아 해찰을 하거나 생각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곤 했었다. 부처는 집착하지 말라고 했는데 스님들은 한결같이 어려운 법문에 집착하고 어려운 한자어에 집착하고 자신들만 아는 지식에 집착하여 법문하고 있었다. 그러니 법문보다 책 한줄 읽는 게 낫다는 생각은 당연했다. 그런데 무여 스님 법문을 들으며 처음으로 눈물이 났다.

 

무여 스님의 떨리면서도 나직나직한 목소리가 내 가슴을 돌아다니면서 멸절한 세포들을 세우고 있었다. 편견과 편애로 가득한 내 정신의 결핍 속을 어루만지며 위로하고 있었다. 그랬다. 무여 스님에게선 법문으로 위장한 언어놀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인간의 한계를 획책하려는 불가능한 주술 따위도 없었다. 댓돌위에 가지런히 놓인 하얀 고무신 같은 눈부신 햇살만이 있었다. 내 몽매한 정신을 비집고 들어와 한줄기 빛을 던져준 무여 스님의 환한 미소가 고맙고 고마워 눈물이 났다.

 


쉴 때도 눈물이 필요하다

 

무여 스님은 말씀하신다. 깨치지 못할까 두려워 말라고, 오직 마음을 닦아갈 뿐 이루어질까 아닐까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그러므로 쉴 때도 눈물이 필요하다고,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고요를 찾아내야 한다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괴롭다고 느끼는 순간, 화가 고개를 쳐드는 순간, 그 순간순간 마다 우리의 마음속에 고요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쉬는 일은 생각을 쉬는 일이며 쉬는 일은 온갖 번뇌 망상을 쉬는 일이기에 쉬고, 쉬고 또 쉬면 깨달음을 얻어서 몸과 마음이 자유자재하게 된다고 스님은 말씀하신다. 조계사에서 무여 스님을 뵙고 그해 가을에 축서사를 찾아갔었다. 스님을 뵐 생각은 있었지만 일면식 없는 스님을 뵙는 것이 과연 수행하시는 스님께 결례는 아닐까 싶어 축서사 부처님만 뵙고 왔었다. 그리고 이번 오월에 나는 다시 축서사를 찾았다. 부처님이 오시기 전날, 사월 초이렛날에…….

 

두 번째 찾아간 축서사에는 연등이 문수산 깊은 골짝을 에돌아 나온 바람을 타며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하늘로 오르는 것 같은 계단을 지나 대웅전에 서서 뒤를 돌아보니 한편의 거대한 경전 같은 소백산맥이 큰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축서가 무슨 뜻인가 궁금했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던 인도의 영축산을 본떠 지은 이름일 것이라고 한다. 신라 문무왕 13년에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하니 무수한 시간의 무늬가 곳곳에 남아있는 듯 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법당이 여러 채 있었고 승방도 열채가 넘게 있었으며 도솔암, 천수암의 암자도 있었지만 어느 세월엔가 사라지고 말았다. 무수한 전설을 품고 시간이라는 영원과 함께 그대로 자연이 된 축서사에서 나는 마음속 스승이 늘 그 곳에 계셔서 참 다행이라고 스스로 안위했다.

 

태백산맥이 흐르면서 소백산맥을 만나 깊고 깊은 문수산을 품고 그 문수산에 축서사가 들어 앉아 있으니 도 닦기에 알맞은 곳이 틀림없다. 이곳에 계신 무여 스님은 다 허물어진 옛 축서사를 일으켜 세우고 중창하셨다고 한다. 서울 조계사에서 뵌 무여 스님을 다시 축서사에서도 뵐까 하는 기대를 또 품고 올라와 보니 그 마음 또한 집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웅전에서 기도하는 스님들의 저 경건한 뒷모습이 경전이고 가르침 아니던가. 나는 만나고 싶은 욕망과 만나지 말아야 할 집착사이를 번뇌하느라 허기진 배도 잊고 몇 번이고 탑돌이만 했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대웅전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는 젊은 스님들의 맑은 웃음이 바람인지 산인지 하늘인지 분간 할 수 없어 그냥 바라만 보았다. 축서사의 풍경 속에서 인간도 부처도 저 아스라한 화엄세상의 주인이 되고 말 것이라 생각하는 동안 젊은 스님들은 대웅전으로 사라지고 나는 홀로 남아 바람에 나부끼는 연등만 바라보았다. 나는 때때로 괴로운 삶에 집착하고 작고 사소한 행복에 목숨 걸지도 모른다. 인생이 그러하듯 고해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으로 생을 마칠지도 모른다. 허나 나는 알고 있다. 소백산맥의 문수산 깊은 산골에서 수행 정진하시는 무여 스님처럼 맑고 깨끗한 법열이 나를 화엄세상으로 이끌 것이란 것을, 그 화엄세상으로 가는 길에 나는 쉬고, 쉬고 또 쉬며 마음을 다 내려놓을 것이란 것을.

 

 

 

 










전승선 기자
작성 2019.07.09 11:31 수정 2019.07.09 11:31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전승선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