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기행] 소백산 부석사



소백산 부석사

 

태연하고 무심하게 가을이 왔다. 덧없다거나 쓸쓸하다거나 하는 상투적인 말도 없이 가을 내내 소백산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나는 태연하고 무심하게 온 가을과 어울려 지냈다. 그런데, 나는 지나친 피로에 시달렸고 소백산 깊은 산중의 길은 대책 없이 아름다웠다. 백석 때문이었다. 두꺼운 세권짜리 백석 평전을 사서 밤낮없이 읽어댔더니 피로가 나를 정복하고는 떠나질 않았다.

 

책속을 유영하면서 그의 숨결이 스민 곳곳을 따라 평북 정주를 다녀오고 오산고보도 다녀왔으며 일본의 아오야마학원의 커다란 나무 그늘에 아래 서서 명상에 잠겨도 보았다. 백석이 존경했던 일본시인 이시카와 타구보쿠를 만나 그의 심오한 시세계를 경험해 보고 다시 돌아와 그의 벗들인 노천명, 최정희와 시담을 나누고 자신의 재산 천억보다 백석의 시 한 줄이 더 가치 있다고 한 백석의 연인 자야의 길상사를 가보기도 했다. 종래에는 흰당나귀를 타고 가 나타샤를 기다리던 깊은 산골 마가리에서 나는 백석처럼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가을 때문이었다. 대책 없이 태연하고 무심한 가을 때문에 나는 손에 들린 백석을 따라 소백산 깊은 산중을 헤집고 다녔다. 아름다워서 숨이 막힐 것 같은 가을하늘을 외면한 채 꼼짝없이 백석에게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백석에게서 나를 구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적으로 옥죄어 왔다. 나는 그가 만들어낸 절망쪼가리들을 어루만지며 그를 사랑하고 또 사랑했다. 그렇게 백석을 그리워할 때 소백연봉을 휘돌아다니던 바람이 전하는 부석사의 전언을 듣고 말았다. 그래, 부석으로 가자. 뜬 돌을 찾아 부석으로 가서 마음을 헹구고 오자. 백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나는 가을부석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부석사라는 이름만으로도 이미 나의 자유는 부처 같은 미소가 될 것이라고 혼자 웃으며 부석사로 향했다.

 

부석사는 이미 네다섯 번이나 갔었던 곳이다. 소백산의 매력을 알기 전에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먼저 알았던 나는 남들처럼 부석사의 유명세를 따라 둘러보기를 하는 순례자에 불과했었다. 그렇게 소갈머리 없는 순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부석사는 충분히 벅찬 아름다움을 선사해 주었다. 몇 번의 부석사는 그렇게 나를 분별없이 받아주며 여러 번 바뀌는 매혹적인 계절의 기쁨을 주었지만 나는 부석사의 그 깊고 깊은 내면을 다 알지 못했다. 컴퓨터 바탕화면 폴더 속엔 사진기속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던 부석사의 풍경이 오래된 시간을 견디느라 녹이 슬 지경이었다. 이름께나 알려진 작가들은 한결같이 부석사를 찬미하느라 펜에 침이 마르지 않는데 나는 그들의 펜 끝에서 풀어져 나온 글타래를 보며 수제품이 아닌 기성품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부석사 아래에 차를 세우고 차박차박 올라가자 길가에 전에 못 보던 떡볶이 어묵을 파는 곳이 있었다. 초등학교 사학년이 되었을까 하는 아주 앳된 소녀가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어묵이 먹고 싶어졌다. 천원을 주고 두 개를 맛있게 먹었다. 종이컵에 담아준 국물이 어찌나 맛있던지 두 컵이나 먹었다. 어묵을 먹어서인지 부석사까지 단숨에 걸어 올라갔다.

 

가을에게서 아니 백석에게서 해방되고자 찾아온 부석사에 눈부신 가을이 지천이었다. 나는 가을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무량수전의 기와지붕에 눈을 붙들어 두었지만 하늘은 하필 이렇게 맑고 푸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1,300년 전 이루지 못한 사랑의 전설을 간직한 뜬돌의 주인공인 의상스님과 선묘가 가을 하늘빛을 깨치며 내려올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가을이나 백석, 의상 그리고 선묘가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 가없는 소백연봉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아름다움밖에 없는 부석사에서 나만 쓸모없는 분별심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머리를 한 번 흔들어 생각을 빼내고 무량수전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삼배를 올렸다. 삼배를 마치고 나와 안양루에 서니 저 멀리 끝도 없는 소백연봉이 펼쳐졌다. 이 안양루라는 인문의 증거를 들고 저 진리의 끝 같은 자연을 찬미하는 즐거움을 어찌 설명할 수 있으랴. 자연과 인문의 조화로운 참맛이 살아있는 부석사에서 수없이 닦고 닦았을 스님들의 마음을 만난 듯 했다. 그래, 그것은 분명 마음이라는 우주일 것이다. 우주라는 마음은 가을에게도 있고 백석에게도 있을 테고 그리고 여태 살고도 알지 못하는 내 마음에게도 있을 것이다.

 

부석사는 그냥 보아도 아름답고 자세히 보면 더 아름답다. 그것은 자연이 나 자신이고 내가 자연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나를 보는 것처럼 찬찬히 올라가면서 소백산에게 말도 걸어보고 지나가는 개미에게 눈길도 한 번 주면서 가다보면 일주문을 만나게 된다. 일주문 앞에서 부처님께 인사를 올리고 다시 오르다 보면 눈을 부릅뜨며 겁을 주고 있는 사천왕을 만나게 되는데 그땐 두말없이 합장을 하면 마음이 편하다. 다시 천왕문을 지나 하늘로 오르는 것 같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안양루에 닿게 된다. 바다처럼 펼쳐진 소백연봉을 바라보면서 한번 깊은 호흡을 하면 신기하게도 세상의 근심은 모두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근심을 모두 뱉어 버리고 배흘림기둥이 아름다운 무량수전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나서 뒤쪽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조사당이 나온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다시 걸어가면 자인당이 다소곳이 반겨주는데 그곳의 비로자나부처님께 합장을 하면 비로소 부석사는 다 돌아보게 된 셈이다.

 

가을빛에 노을이 더욱 붉게 타는데 시간은 나를 재촉하며 내려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길가에서 사과를 팔던 할머니가 주섬주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올라갈 때 사먹었던 소녀의 어묵이 저녁의 어스름을 덮고 무럭무럭 끓고 있었다. 나는 다시 어묵하나 사서 먹으며 소녀에게 안녕하며 손을 흔들었다.





전승선 기자
작성 2019.07.15 09:16 수정 2019.07.1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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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