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귀국선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손로원·이재호·이인권

 



여름과 가을이 마주하고 선 계절의 담장 같은 8월이다. 폭염과 소슬바람이 맞물려 조석으로 선선한 기운을 만들 듯 세상도 좀 쿨(cool)해 졌으면 하는 맘 간절하다. 나라 안으로도 밖으로도 그렇다. 올해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로부터 해방광복을 맞이한 후 일흔네 번째의 해(). 해 마다 이맘때가 되면 가슴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민족적인 분기(憤氣)의 앙금이 굼실거린다. 그럴 때마다 흥얼거리는 노래가 유행가 <귀국선>이다.

 

<귀국선>1945815, 일본제국주의의 무조건패망에 따른 우리나라의 해방광복이 낳은 노래다. 그날은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부터 1945년 까지 70년 중에 민족혼의 햇살이 가장 밝게 비친 날이다. 그날은 음력으로 78, 수요일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10~1945년 까지 해마다 26백여 명을 서대문형무소에 강제로 가두었고, 연인원은 10만여 명이 넘게 수감되었었다. 이들 중 10명 중 9명이 독립 운동가들이었다. 해외 유랑객은 또 얼마였던가. 그들이 풀려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상황을 묘사한 노래가 <귀국선>이고, 손로원과 이재호의 합작품을 이인권이 곡성탄가(哭聲歎歌)했다. 1944년부터 1947년 어간에 우리 유행가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이 <귀국선> 노래는 우리 대중가요사의 보물이라고 해도 되리라.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 형제 찾아서/ 몇 번을 울었던가 타국 살이에/ 몇 번을 불렀던가 고향 노래를/ 칠성별아 빛나라 달빛도 흘러라/ 귀국선 고동소리 건설은 크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백의동포 찾아서/ 꿈마다 찾았던가 삼천리강산/ 꿈마다 빌었던가 우리 독립을/ 비바람아 그쳐라 구름아 날아라/ 귀국선 파도 위에 새날은 크다.(가사 전문)

 

https://youtu.be/eeGhGgVnukU

 

1945815일 낮 12. 일본 124대 히로히또(1901~1989)천황은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항복을 방송으로 전파한다. 항복을 받은 상대방은 연합군사령관을 겸한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 태평양전쟁의 종결이었다. 우리민족은 일제식민지 34351일 만에 해방광복의 빛을 되찾았다. 우리 힘이 아닌 국제관계의 역학구조 속에서. 불행 중 다행, 내 땅을 내 땅이라고 부르고 내 이름을 우리말로 쓰고 부를 수 있는 서글픈 감격이었다. 이때부터 귀국의 물결이 일렁거린다. 중국의 상하이와 대련, 소련의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일본의 시모노세키, 동남아시아 등등의 항구에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강제동원자·징용자·해외망명자·유학자·종군위안부 등등. 당시 조국을 그리며 눈물 지우던 동포들, 그 누가 여기에 예외일수가 있었겠는가. 출항지는 각각이었지만 귀항지는 부산항구 제일부두, 인천항·원산항인들 예외였을까. 이 감격·서러움·희망이 교차되는 질곡의 근대사(1876~1945)와 현대사(1945~현재)의 시간경계지대 시대 서정을 손로원이 노랫말로 얽고, 동양의 슈베르트라고 불리던 이재호가 곡을 엮어서 이인권이 불렀다.

 

노랫말 1절은 그리던 조국에 돌아오는 동포들의 감격을, 2절은 들뜬 마음을, 3절은 새날에 대한 희망을 그렸다. 멜로디는 4분의 2박자 트로트 리듬에 형식이 무시된 28마디의 곡이다. 노랫말은 손인호가 부산항 부두에서 귀국선의 모습을 직접 보고 만들었단다. 그 당시 고국 부산항을 향하려던 출항지 항구의 아비규환(阿鼻叫喚)상황은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영화 <덕혜옹주>가 대변한다. 이 노래는 신세영이 취입한 첫 음반이 실패한 이후 무대공연을 통해 알려졌다고 하며, 1945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에서 이인권이 1차 취입을 하고, 19512년 무렵 이인권이 재취입하여 흥행에 성공을 했단다. 당시의 혼란한 상황과 기록물의 부재, 자료존안의 불가항력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에 대한 세밀한 연구도 민족학적 입장에서 큰 의의를 갖는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귀국선. 망망대해 현해탄 일렁거리는 물결, 만경창파 위의 고국을 향한 배에 실었던 희망과 광복의 현실은 차갑고 따가운 현실과 맞물린다. 미국과 소련의 정치적 합의 원한의 38, 남조선노동당 창당과 맞물린 좌우이념대립, 임시정부의 미온적 귀국, 찬탁과 반탁의 혼란, 이념의 극과 극의 대칭점 남북한 각각 정부수립,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등등.

 

당시 35세이던 손로원은 1911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손희몽·불방각·손영감·나경숙·부부린·남북평 등의 예명을 사용하였으며, 우리나라 근현대사 속에서 대중가요계의 불세출의 작사거장(作詞巨匠)이라 할 만하다. <물방아 도는 내력>, <봄날은 간다>, <잘 있거라 부산항>, <홍콩아가씨>,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샌프란시스코> 등등이 그의 손끝에서 씌어졌다. 그는 6.25전쟁 당시 부산에서 단칸방 벽에 세계지도를 붙여 놓고 이국정서가 가득한 노랫말을 만들었단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노래는 당시 우리나라를 돕기 위하여 부산항에 들어온 병원선에 타고 있는 간호사를 보고서 선물을 하려고 노래를 지었단다. 그의 성장기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정규교육을 받은 근거는 없으며, 독학으로 대중가요 작사를 익힌 것으로 본다. 그는 미술로 대중예술계와 인연을 맺으면서, 1930년대에 작사활동을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노래 <귀국선>이 도화선이다. 그는 반야월과 함께 1950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사가로 활동했으며, 두주불사(斗酒不辭) 주종물문(酒種不問)의 애주가로 유명했으나, 사적인 삶에 관한 자료나 증언은 거의 없는 편이며, 19731211일 향년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해방 귀국선과 관련한 아픈 상흔, 후키시마호 침몰사건은 어찌 되새겨야 하나. 1945824, 패망한 일본은 해군 후키시마호에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을 태우고 부산항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이 배는 그날 일본 마이즈로 앞바다를 항행하다가 원인 미상으로 폭발하여 침몰한다. 일본정부는 폭발원인을 미군의 기뢰로 지목하고 한국인 524명이 희생됐다고 발표했다. 75년의 세월 속에 묻혀 있는 우리 근대사의 미궁(迷宮)이다. 삼가 희생되신 동포님들의 영면을 기원 드리며, 다시는 이러한 상흔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지혜와 슬기를 모우기를 소망한다. 활초.

 


유차영 : 솔깃감동스토리연구원장/ 문화예술교육사



편집부 기자
작성 2019.08.10 09:01 수정 2019.08.10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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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