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기행] 오대산 상원사

전승선

 



오대산 상원사

 

전나무가 묻고 주목나무가 대답하다

 

명쾌했다. 햇살 말이다. 겨울 한가운데서 진한 그림자를 만드는 이런 명쾌한 햇살을 나는 사모한다. 이런 햇살은 번뇌까지도 사라지게 만든다. 상원사 부처처럼 명쾌한 힘을 지녔다. 그래서 상원사는 따뜻하고 안정적이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의 영원이 상원사에서 적멸하고 있었다. 동종을 보면 알 수 있다. 맑고 청아한 음향은 해탈한 이의 눈빛과도 같다. 이 종을 만든 이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절대고독에 맞서 부처처럼 명쾌한 힘을 만들고 나니 이토록 현현한 아름다움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월이다. 이월은 난해하다. 니체보다도 난해하고 이백보다도 난해하다. 밑동만 남아 눈 속에 파묻힌 오대산 전나무보다도 더 난해하다. 이월에 길을 떠나면 길의 절반은 반성으로 채워진다. 어디든 쓸쓸함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허공으로 난 길을 걷는 것 같다. 그러나 방전된 삶을 진실한 느낌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진정 이월에 떠나야 한다. 이월은 고독을 키우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충돌과 갈등을 이겨내고 성찰된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이월이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월을…….

 

이월에 상원사에 온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이월의 하늘이 선명한 태양을 걸어놓고 쌓인 눈들을 녹이고 있었다. 저 눈이 다 녹으면 동안거에 들었던 산승들은 암자를 나올 것이다. 겨울과 봄 사이에 서 있는 전나무는 산승의 지친 심신을 맑게 씻어주기 위해 부지런히 맑은 바람을 풀어내며 뭇 생명들을 깨우고 있었다. 그래서 이월의 상원사는 명쾌한 힘을 가지고 있다. 상원사 계단을 오르는데 작은 다람쥐 한 마리가 또르르 달려왔다가 까만 눈을 뎅굴뎅굴 굴리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너도 이월이 좋은가보구나. 이월 안에서 고독을 키워 세상으로 나왔나 보다. 나는 녀석에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미소를 다 주고 문수전 앞에 서서 하늘을 품고 있는 오대산을 바라보았다.

 

절집에 대웅전이 없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상원사엔 대웅전은 없고 문수전이 대웅전을 대신하고 있다. 바로 여기 상원사가 문수신앙의 발원지이며 중심이지기 때문이다. 그 옛날 아주 먼 신라 때 보천과 효명이라는 왕자가 오대산 비로봉에서 1만 문수보살을 만나고 나서 왕위에 올랐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그가 바로 성덕왕인데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지금의 상원사 터에 진여원을 창건하고 문수보살상을 봉안하였다 하니 대웅전 대신 문수전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는 문수전의 문을 열고 들어가 삼배를 했다. 나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기도의 언어에 실어 저 우주 속으로 날려 보냈다. 문수보살이 나를 나직이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염치없게 절을 하고는 얼른 나왔다. 그리고는 수 없이 와서 수없이 보았던 상원사를 또 둘러보며 어느 해 이월처럼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은 노승의 하얀 고무신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노승이 벗어 논 눈부신 고무신만 바라보다가 나는 문수전 앞에 서서 오대산 어깨와 맞닿은 동종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이 산중에 넘쳐나는 자연의 소리보다 저 동종의 공명이 천계로 먼저 가 닿을지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하기에 저토록 아름답지 않던가. 언제 저 동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문수보살의 사랑이 바로 저 동종으로 현현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단아한가 하면 화려하고 화려한가 하면 소담한 목조 문수동자상이 나를 불렀다. 세조와 인연을 두고 있는 문수동자상인데 문수전 입구 돌계단 옆에 있는 고양이 석상도 자객으로부터 세조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니 세조와 깊은 인연으로 묶여 있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러고 보니 상원사를 키운 것이 세조인지 세조를 키운 것이 상원사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불심을 두고도 유교를 앞세운 세조의 고뇌는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상원사에 와서 적멸보궁을 가보지 않으면 매우 섭섭한 일이다. 그러나 이월의 상원사는 적멸보궁으로 오르지 못한다. 눈 세상이 되어 통제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번 적멸보궁을 다녀왔지만 그때마다 그 길을 걷는 즐거움을 잊을 수 없었다.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길은 그냥 길이 아니라 마음에 놓인 고요의 길이다. 그 길을 오르면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길이 적멸이다. 적멸하지 못한 것들이 그 길에서는 모두 적멸하고 마는데 이월의 적멸한 길을 두고 나는 적멸보궁으로 걸어가지 못함을 서운해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 영원할 수 있을까?”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까?”


상원사를 내려오는데 전나무가 주목나무에게 사랑이 영원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주목나무가 전나무에게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되물었지만 전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영원하지 않아서 행복한 이 세상을 나를 사랑한다. 영원이라는 로망으로부터 자유를 준 상원사를 사랑한다. 전나무도 안녕, 주목나무도 안녕,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여 영원하지 않기를,

 

안녕



 


전승선 기자
작성 2019.08.19 10:41 수정 2019.08.1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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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