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기행] 익산 미륵사지

전승선



익산 미륵사지

 

미륵, 세상의 건너편에서

 

봄과 여름 사이, 나는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봄꽃들이 스스로 사위어 가더니 태양은 지구를 구워버릴 듯이 강렬하게 내리쬈다. 열사의 나라 중동에서 시작되었다는 신종전염병 메르스가 온 나라를 공포에 몰아넣으며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시켰다. 메르스에 대한 대처를 적절하게 하지 못했던 정부는 국민들의 질타를 받고 경제는 침체되어 불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새로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처럼 작고 작은 하찮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지 모른다. 우주 어딘가를 떠돌다 지구에 내려온 신종세균의 출현으로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또 한없이 위대했다. 이천 십오 년 여름에 말이다.

 

여름, 지리멸렬하다. 여름의 목적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여름은 비루하고 비존재론적이다. 내 생각일 뿐이다. 여름은 물질을 근거로 삼는 유물론의 복제다. 하필 이 여름에 나는 독한 생각을 품고 여름을 분석하고 학대했다. 아마 더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습하고 강렬한 더위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을 미친 듯이 키우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여름이 싫었다. 여름의 목적을 의심하면서 나의 여름은 사무실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겨우 햇발이 퍼붓는 골목길을 오가며 양산 아래 숨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알베르 까뮈를 이해할 수 있는 여름이다. 너무 뜨겁게 빛나던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인 뫼르소의 그 여름을 생각하면서 나는 창문을 뚫을 듯이 내리 꽂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래, 여름이다.

 

떠나야 한다. 여름이니까. 떠나서 까뮈도 잊고 모르소도 잊고 나도 잊어야 한다. 점령군 메르스의 환영도 잊고서 태양아래를 걸었다. 달아오른 태양은 칠월의 도시를 터미네이터처럼 이성적으로 데우며 내 발걸음을 묶고 있었지만 나는 기어코 서울역에 도착해서 기차에 올랐다. 고독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감성의 무게를 짊어지고 나는 익산으로 떠나는 기차에서 영화처럼 흘러가는 서울의 영상을 빠르게 뇌 속으로 집어넣었다. 기차 안은 여름과 단절된 채 시원하고 아늑했다. 마치 은하철도 999처럼 우주를 유영하면서 여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문명의 옷은 평안을 보장해 준다. 그러나 나는 평안과 평화사이를 방황해야 했다. 기차는 영원하지 않고 나는 얼마 못가 익산에서 내려 다시 여름과 맞닥트려야 했기 때문이다.

 

익산은 소박했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시골아낙처럼 겸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디를 가든 그랬다. 고만고만한 빌딩들이 여름태양아래 소박하게 서 있었고 사람들은 겸손하게 거리를 오갔다. 그래서 마음이 편했다. 금마면 미륵사지로에 발을 딛었을 때 절정이었던 여름도 낭만으로 변하고 있었다. 천년을 넘어 한없이 텅 비어있었을 들판은 시간을 이기는 법을 알고나 있었는지 낭만적이다 못해 고독하기까지 했다.

 


시간위에 우뚝 선, 미친 존재감

 

익산, 낯설다. 낯설어서 나는 익산이 좋다. 누군가 익산은 만경강이 흐른다고 일러주었지만 나는 사라진 이름 이리를 기억했다. 도시 하나를 통째로 날렸던 이리역 폭발사고를 기억하며 속절없는 사랑도 기억했다. 신라의 선화공주와 백제의 마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대명이 되었지만 사랑이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미륵사지의 전설을 이고 앉아 사랑이라는 고독의 주인이 된 그들이 나에게 주술을 걸고 있었다. 그래서 부처도 사랑 앞에선 소모품인지 모른다.

 

미륵사지의 미륵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마 저 우주 어디쯤을 걸어오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하기에 미륵사지석탑은 여전히 아름답고 위대하지 않는가. 우리들만의 사랑을 벗어나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지 모른다. 백제라는 역사는 미륵사지를 남기고 사라졌지만 역사가 돌듯이 사랑도 돌고 돌아 다시 익산의 주인이 되지 않았던가. 미륵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사랑이 익산에서 여름태양이 되고 푸른 하늘을 떠 바치고 있는 석탑이 되어 유폐된 천년의 시간을 열고 나왔을 것이다.

 

나는 아주 천천히 미륵사지를 걸었다. 한발 한발 옮기면서 미륵을 생각했고 사지의 기운을 온몸에 담았다. 땅속에 잠들었던 돌덩이들이 다시 땅을 열고 나와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가며 탑으로 우뚝 서고 있었다. 화강암의 단단함이 상하의 기단도 없이 사방 3간의 다층으로 쌓아올린 균형의 미를 보면서 나는 소박하고 겸손했을 익산의 조상 백제인들을 생각했다. 저 염치 있는 익산의 땅에서 시간을 견디고 견디다가 어느새 미친 존재감으로 다시 찾아온 백제인들에게 나는 혼을 빼앗긴 채 걷고 또 걸었다.

 

용화산 아래 뜨거운 태양을 뒤집어쓰고 고요하게 명상에 잠겨있는 미륵사지로 언젠가 미륵은 올 것이라는 믿음은 진실이다. 믿음이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륵은 사랑이다. 아니다. 사랑이 미륵이다. 미륵이 사랑이든 사랑이 미륵이든 아무렴 어떠랴. 나는 이 여름에 떠나왔고 익산은 평온했다. 그래서 떠나오길 잘했다. 미륵은 만나지 못했지만 미륵사의 흔적만으로도 익산의 빛나는 사지는 만났으니 나의 익산여행은 여름 안에서 빛났다. 여름이 내게 가만히 속삭였다.

 

그러니, 사랑하라 뜨거운 여름을…….







전승선 기자
작성 2019.09.02 09:17 수정 2019.09.02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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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