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부처의 향기 가득한 불암산(佛巖山)

불암산 산속은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



13호 태풍 링링(玲玲)이 소녀답지 않게 한반도에 큰 생채기를 남기고 떠난 다음날 아침, 불암산으로 근교 산행을 나선다.

 

가을을 배달하는 9월의 햇살은 까칠하다. 들바람 불어 좋은 가을 산에는 숲길에서 들려오는 운치 있는 풀벌레 소리, 나뭇잎이 내는 소슬한 바람소리에 가을이 더욱 청명하게 느껴진다.

 

가을 산길을 홀로 걸어보라.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이 왜 헝클어져 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구불구불한 산길은 구불구불한 우리네 인생과 닮아 있다. 그 속에서 낙엽을 떨구게 될 나무들은 마치 길 떠나는 수행자 모습 같다. 나도 무언가를 미련 없이 떨구고 싶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많은 욕심의 나뭇잎들을 달고 살았던가.

 

서울특별시의 노원구와 경기도 남양주시에 걸쳐 위치한 이 산은 송낙(松蘿笠, 소나무 겨우살이로 만든 여승이 쓰는 모자)을 쓴 부처의 형상과 같다 하여 불암산(佛巖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거대한 암벽과 울창한 수목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치를 자랑하는데 산 속 곳곳에 숨어 있는 듯 자리한 절집들도 만날 수 있어 더욱 풍성한 가을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상계역에서 중계4동 주민센터까지 도보로 이동한 후 불암산 둘레길로 들어선다. 산길은 적막하고 고즈넉하다. 느릿느릿 걷는 것처럼 마음에 충만을 주는 행위도 드물다. 충만은 두 사람이 동행할 때보다 혼자 산행할 때가 더 깊어진다.

 

산 이름처럼 바위들이 많아 옛 부터 인근 주민들은 '돌산'이라 불렀단다. 불암산 둘레길에서 처음 만나는 바위는 여근석(또는 음석)이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바위로 마을에서 동제까지 지냈다고 한다.


 

 

 

숲속 쉼터를 지나 경사가 급한 포장도로를 따라 학도암에 오른다. 오늘따라 암자 솔향기가 유난히 코끝을 스친다. 산 아래 마들에서 시작된 건물 숲은 끝 간 곳이 없는데, 산속 암자는 회색 바다 위에 떠있는 섬처럼 느껴진다.



학도암은 1624년 창건된 이후 줄곧 작은 암자였는데 1872년 명성황후의 시주로 조성된 마애불로 유명해 진 사찰이다. 높이가 13.4m에 이르는 관음보살은 자비의 화신답게 부드럽고 넉넉해 보인다. 조각이라기보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숲속에 늘어선 나무들의 몸은 경전이다. 우짖는 새들의 낭송은 독경이다. 녹색 숲 사이로 여기저기로 촛농처럼 흐르는 암반들이 허옇고 거대하다. 그래서 이 산은 오직 푸르기만 한 게 아니라 희고 밝다.

 

깔딱고개를 지나고 나무계단을 걸어 산꼭대기에 오르면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 거대한 화강암 통바위가 우뚝 서 있다. 이 바위 덕인지 해발은 높지 않지만 주변 전망이 넓게 트여 마치 높은 산에 오른 느낌을 받는다.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정제미, 균형미, 함축미가 섞인 모양새가 한편의 단아한 선시를 보는 듯하다. 소나무 뿌리의 인욕(忍辱) 때문에 바위가 금이 가 있는데, 실로 소나무는 살아 있는 법문이다.

 



정상에 서면 북한산 인수봉과 백운대, 도봉산, 수락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팔당 근처 검단산과 예봉산도 한눈에 들어온다. 산을 오르는 동안의 힘겨움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땀방울 맺힌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산길의 임자는 나무들이다. 나무들은 어쩌면 생의 가파른 먼 길을 걷고 걸은 귀 마침내 좌정의 뿌리를 얻은 생물일지 모른다. 그저 조용히 다른 자연의 형제들이 내는 교향악을 경청하는 일일 뿐. 나무들은 일말의 고뇌조차 없이 그저 제 몸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거나 우듬지에 쏟아지는 햇살과 희롱한다.


나무들의 침묵과 위엄. 이건 덧없는 존재가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최상의 미덕이다.



하산길 바람에 실린 희미한 염불 소리 기척으로 산사가 멀지 않았음을 안다. 경수사 암자에는 물 흐르고 꽃이 피어있다. 작은 암자지만 거대한 암벽이 불암폭포를 품고 있다. 서울 근교의 산을 통 털어 가장 큰 폭포인데 비가 내리면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경치는 가히 장관이다.





태풍은 지나갔지만 가을 산길에 부는 바람이 드세어 우거진 덤불을 눕힌다. 바람 따라 산객의 헛된 욕망도 사라진다. 산새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소리들은 소쇄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정처 없이 왔다가 기약 없이 떠나는 운수(雲水).

 

사실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이거늘 딱히 절집이 무슨 소용이랴.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9.09.10 10:43 수정 2019.09.1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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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