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산사기행] 안산 봉원사




안산 봉원사

 

가을이 오면 이별하자고 했다. 봉원사 마당을 거닐면서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 해 가을이 오기 전에, 가을이 와서 이별을 하기도 전에 우리는 만날 수 없었다. 우리가 꿈꾸었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학교는 문을 닫고 신촌바닥을 떠돌던 순결한 민주투사들도 떠나고 말았다. 나는 자주 봉원사 마당을 거닐며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난 그를 기다렸지만 가을이 다 가도록 그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청춘은 사라져갔다.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시대가 왔지만 그해 가을은 다시 오지 않았다.

 

사랑이 떠나간 저녁

울어라 바람아

신촌 로터리 선술집

낡은 의자에 앉아

네모난 세상을 조소하며

절망의 오물을 토해낼 때

사랑은 관악산을 넘어

먼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지독한 사연 하나쯤 인생이라는 노트에 적혀 있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젊은 날에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일들도 시간을 좇아 흘러가고 만다. 그게 인생이다. 시대의 아픔으로 점철되었던 청춘의 한철은 환멸과 고통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또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나의 자화상을 노래한 첫 시집 속의 첫사랑이라는 시처럼 사랑도 하고 혁명도 하고 꿈도 꾸고 이별도 한다. 누구나 그래서 은 아름답다. 첫 번째, 첫사랑, 첫아이, 첫 출근 등 은 인생을 고귀하게 하는 대명사인지 모른다. 삼십 여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찾은 봉원사에서 나는 첫사랑을 생각했지만 첫사랑은 오간데 없고 낮달만 무심히 떠 있었다.

 

이념 없는 이념이 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지금 신촌은 세계젊은이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봉원사는 일없이 늙어만 가고 있었다. 세상일이 그런가 보다. 늙는다는 것은 서러운 일이 아닌데 이 세상에서는 서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한낮의 고요가 절 마당을 뚫을 듯 적멸한데 바로 몇 발자국 아래 신촌은 팔딱팔딱 뛰는 생선시장처럼 활기가 넘친다. 값비싼 옷과 보석으로 치장한 젊은이들이 팡팡거리는 클럽에서 무아지경의 춤을 추며 세상 따위는 다 잊고 저들만의 천국에 빠져 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아니라 젊음천국 늙음지옥이 되어버린 것 같아 쓸쓸하고 또 쓸쓸하지만 생각해보면 늙음은 축복이다. 젊음이라는 아름다움이 세포 속에 녹아있는 축복이기에 늙음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음의 열기로 들끓는 신촌바닥을 지나 봉원사 마당에 내리는 고요한 햇살 같은 것이 늙음이다. 어찌 이 고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문득 걸어서 찾아와도 좋은 곳이다. 고만고만한 집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길을 지나 안산 자락에서 천년을 살고 있는 봉원사에 오면 한세상 폼 나게 살진 못했어도 마음이 고요해지고 겸손해진다. 소심하게 인생을 관조할 일이 아니라 격정적이고 열정적으로 인생의 저녁을 고요와 대적해도 좋을 일이다. 신라의 도선국사도 그러했고 고려의 보우스님도 그러했으며 조선의 지인대사도 그러했다. 봉원사는 이토록 긴 역사를 끌고 오면서 서울 장안 사람들에게 안식과 평안을 내어주고 있다.

 

봉원사는 태고종 본산이다. 따지고 보면 태고종이나 조계종이나 천태종이나 저들끼리 서로를 분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것이 높고 어느 것이 낮은 것은 아니다. 인간의 분별심이 만들어낸 이기심에 불과하다. 천년고찰 봉원사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고 깨달음으로 향해 갔던 불심 깊은 이들의 발자취만으로 봉원사는 봉원사답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신라 진성여왕 때 연세대 터에 반야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지만 영조 때 지금의 봉원동으로 옮겨 봉원사라는 영조의 현액을 받았다. 마을사람들은 새로 지은 절이라고 하여 새절 혹은 해절이라고 불렀다고 하니 지금도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은 아마 그렇게 부르고 있을 것이다. 전법수행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봉원사는 십만 명의 불자가 부처의 마음을 닮기 위해 수행하고 있는 곳이기에 전통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종로와 가까운 인연으로 고종 때 일어난 갑신정변의 주체적 장소가 되었던 곳이 봉원사다. 개화파의 주역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봉원사 주지로 있었던 이동인 스님 휘하로 몰려들어 갑신정변의 요람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이동인 스님은 개화파의 정신적 지도자로 난국에 처한 조선을 구하고자 애쓴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나라의 국운이 흔들릴 때마다 봉원사의 도력 높은 스님들이 나라를 구하고자 애쓰면서 유구하게 맥을 지켜오고 있었기에 유네스코 세계유형문화유산이 되었을 것이다.

 

서울, 신촌 언저리 안산을 지키고 있는 봉원사엔 첫사랑을 안고 찾아오는 이도 있고 마지막 사랑을 안고 찾아오는 이도 있을 것이다. 꿈을 찾아오는 이고 있고 꿈을 버리려고 오는 이도 있으며 산사가 좋아 오는 이도 있고 부처의 품에 안기고 싶어 오는 이도 있을 테지만 어찌하여 오든 봉원사 대웅전 앞에 고고하게 피어있는 연꽃을 바라보면 내 자신이 보인다. 아름다운 연꽃은 어디가고 고요와 한 몸이 된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참한 말이다.





전승선 기자
작성 2019.09.23 11:22 수정 2019.09.2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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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