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간세설] 호호실실(好好實實)해보리라

이태상

 


얼마 전 한국에선 성매매특별법의 위헌여부가 심판대에 올랐었다. 성매매행위 자체의 불법성이 아니라, 착취나 강요가 없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성을 파는 행위까지 법으로 규율하는 것이 옳은지가 쟁점이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는 매춘과 성적 상대를 제한한 결혼제도에 대해서 우리 잠시 생각해보자. 하룻밤 몸을 파는 남녀를 소매상 창녀, 남창이라고 한다면 상대방의 재산, 사회적인 지위, 직업 등을 보고 일생을 파는 행위는 도매상 매춘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징집이 아니고 자원한 직업군인인 용병으로 자신의 목숨을 포함해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만행에 비한다면 매춘행위는 자비롭기까지 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고 죄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단죄하는 것은 신의 몫이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서로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제의 사마리아로 김기덕 감독은 지난 2004년 제54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한국인으로선 처음으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사마리아는 성서에 나오는 지명으로 이 영화는 그리스도가 죄 없는 자가 나와서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했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착안된 것이다. 매춘을 통해 불교 포교를 했던 인도 매춘부의 설화를 모티브로 원조교제 여고생을 다룬 사마리아에서 우리가 타락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과연 어떤 건가를 질문하고 있다.

 

원조교제를 소재로 했지만 우리 사회의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으며 모두가 공범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모두가 공범이라면 다 같이 살아야 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뉴스에서만 듣고 보던 끔찍한 살인사건이 내 주변에서 몇 년 전 벌어졌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 온 한 아가씨와 결혼한 재미동포 청년이 살해당한 일이다. 홀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들이 좋아서 한 결혼이었다는데 한창 단란했어야 할 신혼생활이 어처구니없이 비극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임신 중이던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조산한 아기까지 남겨진 너무도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이다. 부부간에 다툴 때마다 아무 일도 아니라며 어머님을 안심시키던 아들이 그 몇 달 전부턴 이혼해야겠다는 걸 어머니는 물론 주위에서 극구 만류했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유행하던 아니면 말고처럼 모든 일에 억지를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런 억지는 결과적으로 모두가 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가 되고 만다. 예부터 서양에선 살인보다 이혼이 낫다 (Better divorce than murder)’라 했고, 대서사시 실락원(Paradise Lost)’를 쓴 시인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이혼의 교의(敎義)와 규율이란 주제로 1643년 영국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 의도한 결혼의 가장 숭고하고 주된 목적은 서로 잘 맞는 대화라며 이런 대화가 불가능할 경우에는 이혼이 당연한 공민권으로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설혹 남의 이목이나 자신의 체면 그리고 아이들 때문에 이혼을 못하거나 후환이 두려워서 살인을 감행하지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마지못해 같이 살면서도 배우자가 죽어 없어졌으면 하는 경우라면 이야말로 살인 아니 암살을 날마다 반복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존 밀턴이 장님으로 눈이 멀었을 때 발견한 것이 시()란 말을 곱새겨 반추해보자.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는 상대의 단점과 불행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것이며 이런 사랑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지 마음먹는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저 비틀즈의 노래 제목 그대로 ‘Let it be’라고 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다면 종교나 윤리와 도덕, 법률 그 무엇으로도 억지를 써서는 안 된다. 실로 사랑 이상의 종교도 철학도 진실도 없다고 할 것 같으면 말이다.

 

영국작가 올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 1894-1963)가 일부일처란 가장 부자연스런 성도착증이라고 갈파했듯이 어쩜 일부일처란 것이 좀 억지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같은 동물계를 살펴 볼 때 물개는 수컷 한 마리가 수많은 암컷과 교접하고 여왕벌은 수많은 수벌을 상대한다. 사람의 경우 임금님이 삼천궁녀를 거느리는 것은 옛날얘기로 돌리고 오늘날에도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가 실시되는 곳이 있다. 그 예로 중동에서는 남자가 부인을 공식적으로 넷까지 가질 수 있고, 인도 동북부 히말라야산맥 부근 지방에서는 형제가 다섯이면 신부를 하나만 얻어서 같이 산다고 한다.

 

우리말에 열 계집 싫다는 남자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 반대로 백 사내 싫다 할 여자 없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생리적으로 볼 때 일부다처보다는 일처다부가 더 자연스럽고 더 좀 가능한 일일 것이다. 정녕 삶이란 내 몫을 남김없이 시식하고 또 아낌없이 보시하는 실습실이다.

 

우리 모두 희희낙락(喜喜樂樂) 호호실실(好好實實)해보리라. 일부일처가 되었든, 일부다처가 되었든, 일처다부가 되었든, 다부다처가 되었든 다 좋고 아름다울 뿐이어라.

 


편집부 기자
작성 2019.10.02 11:38 수정 2019.10.02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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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