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새야 새야 파량새야

 

1. 새야 새야 파랑새야

 

대중가요는 역사다. 노랫말은 시대이념, 멜로디는 그 시대를 살아낸 대중의 감성이다. 중국 고서 [예기]에  노래는 세상과 통한다고 하면서 치세 락(), 난세 분(), 망국 탄()이라 했다. 평안시대에는 즐거운 노래, 난세에는 분통 터지는 노래, 망국 상황에서는 탄식의 노래가 불린다는 것. 이 노래는 우리나라 최초의 창가(唱歌). 1885년 전래된 개신교 찬미가의 영향으로 판소리··민요에서 대중성을 띠는 노래가 파생한 것. 이것이 봉건시대와 근대문명의 충돌을 거치면서 국악과 대별되는 유행가, 대중가요로 진화한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녹두꽃이 떨어지면 / 청포장수 울고 간다 / 새야 새야 녹두새야 / 전주고부 녹두새야 / 어서 바삐 날아가라 / 댓잎 솔잎 푸르다고 / 하절인줄 알았더니 / 백설이 펄펄 / 엄동설한 되었구나(전문)

 

1894년 전라도 고부군에 동학혁명 봉기가 일어난다.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여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낫과 죽창을 들고 무장시위를 벌였던 것. 그 총대장은 전봉준. 그가 39세이던 1894년을 전후한 조선 상황은, 일본·청나라·러시아가 조선 지배권을 놓고 충돌하던 시기, 봉건 탐관오리들의 폭정 또한 극한에 달한 때다. 이에 녹두장군 전봉준은 1894320일 고창군 공음면 구수마을에서 4천여 명의 농민군을 모아 놓고, 봉기선언 창의문을 낭독하고 조직적인 항쟁과 집강소 설치를 통한 폐정개혁을 단행한다. 하지만 조정에서 요청한 청나라 군대와 관군의 진압이 강화되고, 이어서 조선으로 진출한 일본군과 충돌한 청일전쟁 등으로 농민군은 진압되었으며, 전봉준은 1894122일 순창에서 옛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3남지방(충청·전라·경상)을 중심으로 불리어진 민중저항노래가 바로 <새야 새야 파랑새야>. 이는 충청·호남지방은 약간 느리게, 영남지방은 약간 빠르게 불리어졌다. 가사도 일부 차이가 있다. 여기서 파랑새는 청나라와 일본군대와 폐정을 자행하던 봉건탐관오리를 상징하며, 녹두새는 고부군수 조병갑을 지칭한다. 또한 녹두밭(녹두나무)은 동학농민군을, 녹두꽃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칭하고, 청포장수는 조선의 백성들을 말한다.(녹두로 묵을 쑤어 먹고 사는 힘겨운 백성들을 은유함)

 

이처럼 구전되던 새야~’를 오선지에 처음 옮긴 사람은 1934년 무렵, 연희전문 졸업반이던 김성태다. 그는 뒷날 정인보 작사 개천절의 노래도 작곡한다. 이 노래는 1956KBS TV방송국 개국방송 때 오프닝음악으로 어린이합창단원들이 불렀다. 우리 최초의 창가가 상징적으로 불린 것이다.


https://youtu.be/kvNq6P4R2aQ



유차영

 










유차영 : 시인 / 한국콜마 상무이사


정명 기자
작성 2018.07.11 16:52 수정 2018.11.14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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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