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간세설] 인생보고서

이태상

 


지난 2008년 미국 카네기 멜론 대학의 컴퓨터과학 교수 랜디 파우쉬(Randy Pausch 1960-2008)는 췌장암으로 47세에 타계하기 10개월 전 행한 그의 마지막 강의(The Last Lecture)에서 뭣보다 동심(童心)의 경이로움을 강조했다.

 

의학적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지 않았다 해도 이 세상의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생물학적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태어났지만 그래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 입장에선 누구나 다 후손과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싶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빗 브룩스(David Brooks)20111129일자 칼럼에서 그의 요청에 응답한 수많은 70세 이상의 독자들이 보내온 인생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공통된 교훈을 도출했다.

 

1, 연속과 단절

 

불행한 사람들은 시간을 연속된 흐름으로 보고 표류해왔나 하면 그 반대로 행복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몇 장으로 분류해 챕터(Chapter)별로 각자의 삶을 재설정 정립,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거나 개척해왔다.

 

2. 반추와 성찰

 

불행한 사람들은 언짢은 일들을 계속 반추하면서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가 하면 그 반대로 행복한 사람들은 궂은일들은 속히 잊어버리고 용서하며 좋은 방향으로 되돌려 왔다.

 

3. 도로(徒勞)와 포기

 

불행한 사람들은 포기할 줄 모르고 전혀 가능성 없는 일에 매달리는가하면, 행복한 사람들은 아니다 싶으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가능성에 도전한다. 특히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 깨닫느냐 그렇지 못 하느냐의 차이다.

 

4. 안일과 모험

 

미인은 용자(勇者)의 차지라는 말처럼 안일을 도모한 사람은 모험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행한 사람들은 그 결과에 상관없이 만족해한다.

 

5. 반골(反骨/叛骨)과 수용(受容)

 

가정이든 회사든 사회든 제도권 밖에서 이방인으로 떠돈 사람들은 불행하고 제도권 안에서 노를 젓는 사람은 행복하다.

 

얼마 전 (2013120일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ZL Technologies 회사 공동창립자 겸 대표인 콘 리옹(Kon Leong) 씨는 젊은이들에게 아주 적절한 조언을 했다. 자기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고. (Try to find your sweet spot...The sweet spot is the intersection between what you’re really good at and what you love to do.)

 

또 얼마 전 (2013210알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Live Person 회사의 창립자 겸 대표 로보트 로카시오(Robert Lo Cascio) 씨는 자기 회사 사훈에 철저하게 입각해 신입 사원을 채용한다며 두 가지 사훈이 있는데 그 하나는 공동소유인이 되는 책임감(Being Owners)’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돕는 봉사정신(Helping Others)’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 신입사원은 이 회사 사훈을 감당할 수 없다며 사직하더란다. (I’m leaving the company because I can’t handle being an owner. I just want to be told what to do.)

 

일정시대 내가 국민(초등)학교 1학년 때 일본인 여자 담임 선생님이 첫 수업시간에 해주신 말씀을 나는 평생 잊지 않고 살아왔다. 학생으로서 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 그리고 사회인으로서도 말이다. 그 말씀이란 세 가지 학생이 있는데 숙제나 공부를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낙제생, 시키는 대로 하는 모범생, 그리고 시키기 전에 본인 자신이 알아서 잘하는 우등생이라고 하셨다.

 

영어에 최선을 희망하되 최악에 대비하라(Hope for the best, prepare for the worst)는 말이 있다. 최선을 희망하는 낙관론자이다 보면 실망할 일이 다반사고, 최악에 대비하는 비관론자이다 보면 자칫 패배주의에 빠져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일찍부터 낙관론자나 비관론자가 되기보다는 만족론자가 되기로 작심했다. 결과가 어떻든 내 최선을 다해보는 그 자체에 만족하기로.

 

삶 그 자체가 목적이고 어떤 삶이든 열심히 살아보는 인생예술가 외에 다른 예술가가 있을 수 없으며 성공이란 결코 행선지 종착점이라기보다 여정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여정 그 자체가 전부로 곧 보답이고 보람이며 보상이 아니랴. 따라서 언제나 어떤 경우에도 승자는 노력하고 패자는 불평하지 않던가. 대학에 가야만 사람노릇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인생대학의 학생으로 평생토록 자신의 인격을 닦고 자아완성의 길을 가는 구도자가 될 생각을, 그리고 취직보다는 창직할 생각을 해볼 수 없을까.

 

언젠가 한국에서 공부가 인생의 전부냐는 항변의 유서를 남기고 남녀 중3생이 동반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뉴스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이 두 어린 목숨을 끊게 한 병들대로 병들고 삐뚤어진 우리 한국사회에 분통이 터졌다. 경기도 용인 N중학교 3학년생 15세의 유 모 군과 같은 반 14세의 한 모양이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공부를 잘할 자신이 없어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나중에 쓸모없는 2차 방정식의 값을 구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의 사랑을 잃었습니다. 우리들의 시체를 같은 곳에 묻어주세요. 행복이 성적순으로 되는 세상, 공부만 하면 인간입니까? 저희들은 새장 속에 갇혀있는 새가 아닙니다. 이제 하늘 높이 날고 싶습니다.”

 

이 두 어린 소년 소녀의 유서에서 우리는 그 어떤 철인 현인의 도통한 경지 이상의 해탈을 볼 수 있다. 이 순수하고 용기 있는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속물근성에 물들고 동화되기를 죽음으로 거부한 것이다. 이들은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절규하면서 공부벌레로 살기보다는 인간으로 죽기를 선택했다. 그것도 서로 좋아하는 남녀로서 동반자살, 정사(情死)하면서 시체를 같은 곳에 묻어 달라고 했다.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불행하게 사는 것보다 행복하게 죽는 길을 택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너무도 애처롭고 안타까운 것은 이 어린이들 보고 죽을 용기로 더 좀 용감하게 독창적으로 파격적으로 비세속적으로 살아보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이들 주위에 없었음이다. 이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의 사랑을 잃었을지언정 서로 사랑하는 짝끼리 죽음의 동반자가 되기 전에 삶의 동반자가 되어보라고 이들에게 일러주는 사람이 이들 주위에 하나도 없었음이다. 누가 타이르지 않아도 이들 본인 스스로가 그런 마음먹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공부를 잘할 자신이 없어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없다고 두 학생은 유서에서 말한다. 예부터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자식더러 부모 행복하게 해달라고 강요하기보다 자식의 마음 편하고 즐겁게 해주는 게 부모 된 도리일 텐데 세상이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된 것 아닌가. 진정으로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길이 학교공부보다 인생공부와 인간수업을 잘해서 훌륭한 사람으로 보람되게 잘 살아주는 것이라고, 무엇을 하든 저 좋은 대로 저 하고 싶은 대로 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라고 격려해주는 것이 참된 어버이 마음이란 것을 이 두 어린 마음속에 왜 진작 좀 더 일찍이 심어줄 수 없었을까.

 

세상사는 길이 이 세상사람 수만큼이나 다 다르고 여럿인데 어떻게 이처럼 한 길밖에 없는 것 같이 이들을 세뇌시켰더란 말인가. 아무리 사()자 좋아하는 세태요 사회라지만 그 사()자라는 것이 다 시대 착오적인 남존여비 관존민비사상의 잔재가 아니던가. 저 아일랜드의 노벨문학상(1925) 수상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가 갈파했듯이 오늘날 모든 전문적인 직업인들이란 일반대중을 등쳐먹는 공모자들이다. (All professions are conspiracies against the laity.)’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님들을 떠받드는 세상 사람들이 또한 공모자들 아닌가.

 

저희들은 새장 속의 갇혀있는 새가 아닙니다. 이제 하늘 높이 날고 싶습니다.’ 이 얼마나 순수하고 자연스럽고 건전한 소망과 꿈이었나. 그렇다면 이들을 입시지옥 성적순으로 도배된 공부방에 가둬두지 말고 밖에 나가 씩씩하게 신나도록 뛰어놀면서 이들의 날개가 어서 크고 튼튼해져 세상을 높이 나는 법을 배우도록 해줬어야 한다.

 

타락한 어른들이 순수한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가르치기보다는 이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어른들이 가르친다는 교육이 고작 각종 편견과 화석화된 고정관념뿐이니 우리 사회가 바로 되자면 어린이들이 어른을 깨우쳐 가르치는 역교육 현상이 일어나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 현존하는 몰인격 몰인성 몰개성 교육이 판치는 한 이솝 우화에 나오는 애꾸눈 원숭이들이 두 눈 가진 원숭이의 멀쩡한 눈 하나를 빼서 생 애꾸눈 원숭이로 만드는 결과밖에 없지 않겠는가. 프랑스의 비행작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나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의 동화 황제의 새 옷에 나오는 아이와 같은 스승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전명희 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9.11.02 12:46 수정 2020.09.1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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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