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꿈에 본 내 고향

6.25전쟁 1.4후퇴 실향민 망향가

김기태·박두환·한정무

 



봄날의 연두빛에 대칭되는 화사한 단풍 빛깔들이 사람들의 눈을 자꾸 끌어당기는 깊은 가을이다. 이러한 절기에는 고향에 붙박아 살면서도 고향이 그리운 절기인데, 하물며 망향객들의 노스텔지어(nostalgia)는 어떠하랴. 이러한 시절에 어울리는 노래가 <꿈에 본 내 고향>이다.

 

<꿈에 본 내 고향>19516.25전쟁 중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국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한 1.4 후퇴 때, 32세의 나이로 평양에서 혈혈단신으로 남하해 온 가수 한정무가 피란지 부산에서 자기 신세를 한탄하듯이 부른 노래다. 이 노래에는 우리들 아버지, 그 아버지의 어머니들의 거칠거리는 주름살 가락이 날줄 씨줄의 곡조(曲調)로 얽혀있다. 노랫말 자체가 기막힌 삶의 넋두리였으므로 대중들은 더욱 절절하게 감응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부른 한정무는 이 노래를 취입한 지 9년 뒤 안타깝게도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노래는 피난지 부산에서 취입되었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몰려온 피난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가지 못하는 심경을 비탄적(悲歎的)으로 읊은, 향수를 달래는 대표 가락이 되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고향을 떠나 온 지 몇몇 해려냐/ 타관 땅 돌고 돌아 헤매는 이 몸/ 내 부모 내 형제를 그 언제나 만나리/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가사 전문)

  https://youtu.be/bqj1umUQ_N8

 

이 노래가 울려 퍼질 당시 피란지 부산(釜山)의 주민등록상 인구는 40, 실제 난민(難民)으로의 생활 인구는 200만 명이 훨씬 넘었단다. 그들은 대부분 실향민, 38선 이북에서 보따리 하나를 머리에 이고 어린 자식들을 걸음마 시키듯 앞세우고 총포 화염을 피해서 밀려온 이들이었다. 그 시절 38선을 넘어서 무조건 남쪽으로 따라 내려온 사람들은 스스로를 ‘38따라지라고 하며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공감대로 위무하기도 했단다.

 

<꿈에 본 내 고향>은 금사향의 <향항아가씨>(홍콩아가씨)와 같이 1954년 한복남이 운영하던 도미도레코드에서 발매된다. 노래가 먼저 불리어지고 음반이 뒤에 나온 예이다. 6.25전쟁 시절 국가 주도의 전쟁과 국방과 경찰 중심의 전투, 민간인의 피란의 피폐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대중가요다. 같은 음반 뒷면의 실린 <향항아가씨>는 진흙 벌 속에서 장미꽃을 연상하듯 전쟁 통에 밀려온 서구적 문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얽은 노래다. 생채기 난 상처와 희망을 아우른 이 노래들은 대중들의 가슴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는데, <꿈에 본 내 고향>은 원래 6.25전쟁 이전 악극의 주제가로 송달협(1917~1955? 평양출생)이 먼저 불렀었단다.

 

한정무는 1919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1.4후퇴 때 북에서 월남한 가수다. 그는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영영 가보지 못한 채 1960년 교통사고로 한 많은 41세의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가 남긴 애창곡은 <꿈에 본 내 고향><에레나가 된 순이>이다. 그의 <꿈에 본 내 고향>2000년 실시한 KBS 가요무대 15주년 기념 조사결과, 백난아의 <찔레꽃>과 함께 방송횟수 공동 1위였다. 2014한국 대중가요 고전 33에서도 한국전쟁 이후 애창 작품 6곡에 선정됐었다. 애창자들은 북녘땅을 바라보는 실향민을 넘어 고향 하늘을 바라보는 모든 망향민이다.

 

또한 이 노래는 1960년대 중반 독일 베를린으로 파견된 한국인 간호사와 광부들, 해외에서 살고있는 교민들, 해외공단 및 건설현장 파견근로자들, 이민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르면 눈물바다가 되는 곡이다. 노래 제목에서부터 그들은 심한 갈증에 차 있었던 향수를 흠뻑 채우려고 눈물을 글썽거린다.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지역과 인종을 막론하고 어머니와 고향이란다.

 

먼 옛날 같은 우리나라의 현대, 1963년 독일로 파병할 광부를 모집할 당시 500명 모집에 46천여 명이 몰려들었다. 당시 남한 인구 2400만 명에 실업자 숫자만도 250만 명이 넘었다. 이런 시절이니 매월 6백 마르크(160달러)의 직장에 지원자가 밀려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루르탄광 지하 1천 미터와 3천 미터 사이 막장에서 1미터를 파고 들어갈 때마다 4~5마르크를 받았다. 196612, 3년의 고용 기간을 채우고 142명의 파독 광부 제1진이 귀국했을 때 거의 전원이 1회 이상의 골절상 병력을 안고 있었다. 파견 간호사의 사정도 비슷했다. 같은 해 1128명이 독일로 떠날 때의 고용조건은 월 보수 440마르크(110달러)였다.

 

1970년대 중반, 서베를린에만 한국 간호사가 2천 명이 넘었다. 1966~76년 독일로 건너간 한국 간호사는 130, 광부들은 1963~78년까지 7800여 명이 건너갔다. 이들의 송금액은 연간 5천만 달러로 당시 GNP2%대에 달했다. 이들은 단 하루도 <꿈에 본 내 고향>을 읊조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특히, 이 노래는 글로벌 코리아 K-팝 한류가 지구촌을 감흥의 도가니로 뒤흔들며 문화예술 감성을 선도하는 오늘날에도 750만 해외 교포들이 한 잔 술에 망향의 향수를 타서 가슴으로 부르는, 그야말로 영원할 국민애창곡 망향가다.

 

해외동포·교포(海外同胞·僑胞)는 외국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 중국은 화교(華僑), 한국인은 한교(韓僑조교(朝僑)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의 외국 이주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인들이 중국 산동성 문등현(文登縣) 신라방(新羅坊)이 그 예다. 고려 시대와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때 많은 한인이 해외로 이주하였다. 국가 보호 아래 정식 이주한 것은 1902년 수민원(綏民院, 대한제국 시대에 외국여행권을 관장한 관청)이 설립되고 하와이로 이주한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주는 1860년대 함경북도 산간에 살던 사람들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것(블라디보스톡, 개척리)이다. 특히 1869년의 흉년으로 많은 농민들이 연해주와 만주, 간도로 본격적인 이주를 하였다. 이들이 간도와 만주지방의 조선인의 주를 이루며, 일본제국주의 시대 독립군과 우국지사들이 대거 합류했다. 이때 형성된 신한촌(新韓村)이 훗날 대한독립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가 단지회(斷指會)를 결성한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된다.

 

19516.25전쟁 중 1.4후퇴 이후 부산을 중심으로 울려 퍼진 <꿈에 본 내 고향> 노래가락에는 그 시절 헤어지거나 고향을 잃어버린 1천만 이산가족과 글로벌 21세기 해외에 거주하시는 750만 교포들의 심금을 울리는 망향가다.

 


[유차영]

솔깃감동스토리연구원, 원장

음유시인 / 문화예술교육사



편집부  전명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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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19.11.04 09:39 수정 2020.09.1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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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