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오매, 단풍 들었네. 설악산 사찰 순례길

찰나의 가을을 음미하기 좋은 시절은 야속하리만큼 짧다


장광에 골 붉은 감닢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가을의 아름다움이 "오매"라는 감탄사 하나로 표현된 김영랑의 "오매, 단풍 들것네"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입속에서 저절로 맴도는 시구다.






여름 내내 짙게 푸르렀던 산들이 꼭대기부터 붉고 노랗게 물드는 모습을 보니 올해도 어김없이 단풍이 찾아온 모양이다. 산하가 생긴 이래 한해도 거르지 않고 되풀이되는 일이련만 이 때 만 되면 빨갛게 달아오른 단풍잎 마냥 가슴이 콩닥거리니 이를 어쩔 것인가.

 

좋은 시절은 야속하리만큼 짧다. 그 찰나의 가을을 음미하기에 산 만한 곳이 없다. 산은 자체가 법당이자 자연이 보여주는 이런 저런 색깔이 온갖 법문인 그런 곳이다. 그래서 산이 내는 의 향연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걸망 하나 메고 설악산 자락 백담사를 향해 떠난다.

 

새벽에 백담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여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백담사로 들어간다. 백담사 계곡은 맑은 물과 기암괴석이 단풍과 어우러져 최고의 절경을 만들어 낸다. 단풍나무와 벚나무가 붉은색, 물푸레나무, 층층나무는 노란색, 옻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는 주황색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산 공기가 소슬하고 새벽이슬에 한기가 서린 백담사 경내를 둘러본다. 대청봉에서 시작해 물이 괸 곳()을 세어 백 번째가 되는 곳에 지어졌다는 백담사는 원시림의 비경을 간직한 내설악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정암, 오세암을 품고 있는 내설악의 대표 도량이다. 시인 겸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이 이곳에 머물면서 님의 침묵등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백담사 앞은 백수정을 깔아 놓은 것 같은 맑고 시린 물이 흐른다. 돌밭이 넓게 펼쳐진 백담사 앞의 계곡에는 크고 작은 돌탑이 수 천기가 넘는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서 계곡의 돌들로 소망을 쌓아 올린 탑이다.


장마 때 불어난 계곡 물에 돌탑은 남김없이 허물어지는데, 무너진 자리에 탑 쌓기는 반복된다. 간절한 소망이 어디 큰물 한번 지나간다고 허물어질 것인가. 새로운 소망과 기도는 돌탑으로, 또 발걸음으로, 설악의 물과 길 위에 한 켜씩 쌓이는 것이다.

 

 



백담사를 나서면 수렴동 계곡을 끼고 줄곧 부드러운 흙길이 1시간 남짓 이어진다. 군데군데 돌길과 얕은 언덕길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산책로에 가깝다. 여기가 설악을 통틀어 가장 편안한 길이리라. ‘수렴(水簾)’에서 ()’이란 햇볕을 가리기 위해 창이나 문에다 치는 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수렴이란 곧 물로 친 발을 뜻한다. 물방울을 매달아 발로 쳐놓은 계곡이라니, 이름이 바로 시()가 아닌가. 수렴동 계곡을 끼고 이어진 길에는 이런 이름에 걸맞게 옥빛 못()과 작은 폭포들이 이어진다.


 


채웠던 것들을 비워내는 계절이다. 절은 마음을 비우는 곳이라고 한다면 잎 떨군 나무들, 그 허심한 풍경이 있는 지금은 어쩌면 절호의 기회다. 단청이 하염없이 빛바래 나무의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곱게 늙어가는 질박한 전각을 볼 수 있으면 더 좋으련만.


 



심심산골 깊은 수렴동에는 가슴이 후련하도록 넓은 바위에 물이 흐른다. 흐르는 물이 얼마나 맑은 지 물속에 손이라도 담그면 속세에서 묻혀온 이 사람의 업보가 한 방울 떨구어진 먹물이 퍼지듯 그렇게 표시가 날까봐 감히 손을 담그기가 주춤거려질 지경이다.

 

그런 길로 빨려 들어가듯 걸으면 저절로 닿게 되는 곳에 무심하게 길가에 나앉은 암자가 있다. 영시암(永矢庵)이다. 길다는 뜻의 ()’ 자에 화살 시()’ 자를 걸었다. 뜻을 풀면 영원한 화살혹은 돌아오지 않는 화살로 읽힌다. 흉흉한 세상을 피해 이곳에 숨어들었던 선비 김창흡은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암자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이 깊은 산중에서 적막한 삶을 산다. 그러나 7년째 되던 해, 같이 살던 거사의 죽음으로 인해 이곳 생활을 마감하고 설악산과 작별한다.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된 것이다.

 

 


 

영시암을 지나면 길은 둘로 몸을 쪼갠다. 둘 다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 정상으로 가는 길인데 하나는 수렴동 대피소를 거쳐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오세암을 들러 가는 길이다. 두 길은 봉정암에서 합류하니 어느 길을 택하든 상관없다. 울긋불긋 등산복을 곱게 차려입은 탐방객들은 열이면 아홉은 수렴동 대피소를 거쳐 오르는 수월한 길로 들어선다.

 

광활한 산협이지만 물물이 찬연하여 한 폭의 섬세한 그림이다. 산책로 오른쪽의 구곡담 계곡에서는 물소리가 은은하게 들리고 계곡 양 옆으로는 매끈하게 빠진 적송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있다. 산길치고는 편안한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사위를 둘러보니 산 빛이 모두 붉게 바뀌고 있다. 이제 시작이구나. 콩닥콩닥. 가슴이 뛰는 속도를 더한다.


 


 

용의 이빨처럼 생겼다하여 이름 붙여진 용아장성 마루금을 헤치고 아침 해가 모습을 드러내자 울긋불긋 이파리들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부서진다. 구곡담의 매끈한 백악에 다채로운 형상을 새긴 무수한 소와 담, 햇빛에 반짝이는 계곡물과 단풍잎, 싱그러운 바람,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이곳에 다 모인 듯하다. 용아장성 기암의 흰 바위들은 봉우리에 걸쳐진 구름인 듯 둘러진 병풍처럼 산세를 꾸리고 있고, 구부러지고 휘어진 소나무의 줄기와 가지에는 만고풍상이 걸려 있는 듯하다.


 


어느덧 백담사에서 10.1km 지점에 있는 쌍룡폭포에 이른다. 백담 계곡에서 가장 위에 있는 두 갈래 폭포인데 왼쪽은 봉정암에서, 오른쪽은 청봉에서 내려온다.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면서 패인 바위는 상처인가 기쁨인가. 떨어진 물들은 흘러내려 고운 연둣빛을 머금고 아래에서 한 몸이 된다. 세상에 태어난 사연이 다르니 폭포에 떠있는 낙엽 하나도 그 빛깔과 모양이 다르다. 자연은 모든 유무정물(有無情物)에게 개성을 준 것이다.

 

이제 설악 속으로 좀 깊이 들어갈 시간이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걷는다. 울퉁불퉁 돌길 건너,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계단을 올라서니 드디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해탈고개에 도착한다.


 


여기서 봉정암까지는 0.5km.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번거롭고, 마음이 밝으면 세상이 밝다. 느긋한 걸음으로 사위를 살피며 마음의 가닥을 잡으니 비로소 호흡이 가라앉고 정신이 맑아온다. 암자에서 들려오는 아련한 목탁소리에 풀렸던 다리에도 힘이 들어간다.


거친 골짜기의 끝. 하늘 가린 나무들의 차양이 물러나며 동트듯 산기슭이 훤해지는데, 거기 청명한 둔덕에 봉정암이 있다.


 



해발 1,244m의 봉정암(鳳頂庵)은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지리산 법계사 다음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백담사의 말사다. 통도사, 상원사, 정암사, 법흥사와 더불어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국내 5대 적멸보궁이어서 불교 순례객들이 항상 넘치는 곳이다.


암자 뒤로 대청봉과 중청봉, 소청봉의 산줄기가 멈추고, 앞으로 좌청룡, 우백호의 용아장성, 공룡능선이 펼쳐진 천하의 길지를 발견한 자장율사가 이곳에 최초의 적멸보궁을 세우려하자 봉황이 날아와 지금의 연화대로 자리를 잡아주었다는데서 암자 이름이 유래되었다 한다.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봉안된 연화대에 오르니 자연과 조물주의 걸작이라고 할 설악의 유곡들이 발아래에 즐비하고, 질리도록 함께하던 마음속의 번뇌도 그대로 녹아 버리는 듯하다.


명산의 정기는 산 자체보다 산을 대하며 지성을 쏟는 사람들의 애절함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사리탑에 참배를 드리고 위쪽의 전망대에 오르면 그야말로 일망무제의 전망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좌측으로는 설악산 서북능선의 중심인 귀때기청봉이, 바로 정면으로는 기암괴석과 단풍으로 유명한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이, 북쪽으로 마등령, 황철봉, 신선봉까지, 오른쪽으로는 신선대와 천불동 계곡이, 멀리는 울산바위와 속초 시내가, 뒤를 돌아보면 소청 대피소와 소청봉이, 중청봉과 대청봉 자락까지 아득하다. 굳이 소청과 대청봉에 오르지 않아도 될 만큼 내설악과 외설악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자리의 조망을 위해 마련된 듯싶다.


과연 이곳에 와보지 않고서 가을 단풍을, 설악 단풍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울긋불긋 단풍이 골골마다 가득하다. 가까이서 보는 단풍도 좋지만 이렇게 멀리서 관조하는 단풍은 또 다른 맛이다. 마치 가느다란 붓끝에 노랗고 빨간 물감을 묻혀 청단, 홍단, 단풍을 점점이 찍어서 완성한 그림 한 폭을 보는 듯하다.


 


 

이 가을 날, 고단한 삶을 영위하느라 펄처럼 끈적거리며 달라붙는 속세의 이런 저런 혼잡함을 맑은 물에 헹구는 마음으로 설악의 산과 산사를 찾으면 주변의 단풍과 함께 타오르는 불심의 가피가 삶을 더욱 맛깔스럽게 해 주리라.


 


 


올랐다 내려오는 산속은 적막하다. 좌선한 나무들, 침묵이 흘러내리는 산자락들, 묵중한 바위들. 오직 내 발걸음 소리만이 고요를 깬다. 구름 걸친 산자락 아래로 흐르는 물길 따라 무심하게 걸으니 육신조차 편안하다.

노을빛 물러가니 산중 암자는 홀로 외롭고 고요하다. 이내 차가운 어둠이 밀려든다. 밝혀줄 등 하나 마음에 내걸으니 마음 또한 편안하다.

 

설악을 오르는 고행의 산길에, 백담 계곡의 돌탑에, 봉정암의 사리탑 앞에, 오늘도 탐방객들과 순례자들의 간절한 기도는 켜켜이 쌓이고 있다.

 

 

 

여계봉 선임기자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9.11.04 10:05 수정 2020.09.1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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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