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산사기행] 태백산 정암사





태백산 정암사

 

 

바다가 깊다 한들 정선 골짜기만 할까. 굽이굽이 강원도 산맥을 돌아 정선읍에 도착했다. 마침 정선오일장이 열리고 있었지만 심술을 부리는 날씨 덕분에 오일장은 일찍 파하고 거리는 휑하니 바람만 불어댔다. 골이 깊으니 산은 높고 산이 높으니 동강은 더 깊고 푸르게 흐른다. 동강을 따라 옥순봉으로 달리는데 머릿속에선 정선아리랑이 맴돌며 입을 근질거렸다. 지금이야 정선이 아름다운 자연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그 옛날 근근이 살아가는 정선사람들의 애절하고 슬픈 삶을 풀어낸 노래가 정선아리랑 아니었던가. ‘당신이 날 생각을 날만침만 한다면 가시밭길 수천 리라도 신발 벗고 가리다라고 한을 실어 노래한 정선 아낙네들의 애환이 굽이굽이 깊은 골짝마다 들리는 듯 했다.

 

나는 작은할매개골을 가기 위해 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삼시세끼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으로 유명해진 옥순봉을 바라보는 양지바른 곳에 마음에 둔 애인이 있다. 애틋하고 사랑스런 사람이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하필 사물을 사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인연이란 사람과 사물 사이에 받침 하나 차이 일뿐 사람과 사물은 서로 붙어 다니는 다정한 사이다. 굽이쳐 흐르는 동강을 바라보며 매일 연서를 보내는 사물의 안부가 궁금하고 그리웠다. 나는 서둘러 작은할매개골로 올라가며 동강을 오르내리던 뱃사공들이 부른 뗏목아리랑이 떠올라 혼자 실실 웃고 말았다.


천질에 만질에 떼 품을 팔아서

술집 갈보 치마 밑으로 다 들어가고 말았네.

한 잔 마시고 두 잔 마시고 또 한 잔을 마시고

목마르고 갈증 나는데 또 한잔 먹네

 

옥순봉을 에돌아 흐르는 동강을 바라보며 나의 사물은 얌전하게 앉아 동강과 연애질을 하고 있었다. 나의 사물이여 그래도 좋다. 광풍에 휩싸이는 세상 따위는 잊고 이곳에서 동강이나 바라보면서 늙어도 좋으리라. 언어의 집을 지어 나의 고독한 정부를 세우고 싶다. 흐르는 동강은 말이 없고 나는 사물을 남겨둔 채 혼자 몽유도원에서 슬며시 나와 다시 길을 떠났다. 나의 착한 사물이여 안녕, 복숭아꽃이 필 때 다시 찾아오리라. 나는 다시 정암사로 발길을 돌렸다.

 

동강을 따라 흐르는 길은 산에 막혀 끊겼다가 다시 강을 만나 이어지면서 손바닥만 한 하늘만 보였다. 정선은 현현하다. 평창과 이웃하고 영월과도 친하며 태백이 옆이지만 정선은 유독 현현해서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정선을 알뜰히 사모한다. 밤하늘의 샛별처럼 사모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길은 길을 따라 계곡을 달리고 계곡은 산을 따라 한없이 깊어만 간다. 그렇게 돌고 돌아 마침내 태백산을 안고 있는 정암사에 닿았다.

 



바람이 차다. 산빛도 차다. 가슴이 저릿하다. 눈꽃도 사라지고 봄꽃은 깨어나지 않은 시절이지만 낙엽송을 타고 오르는 태백산의 기운이 황홀하다. 산소알갱이들이 몸속을 돌아다니며 내 탁한 마음까지 정화시킨다. 정암사 경내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다. 댕그랑 거리는 풍경만 홀로 춤을 춘다. 아무도 없어서 좋다. 홀로 정암사의 고요를 만끽할 수 있어서 더 없이 좋다. 나는 적멸궁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았다. 번뇌가 사라져 깨달음에 이른 보배로운 궁전이 적멸궁이라고 했던가. 어찌하면 번뇌가 사라질 수 있는지 부처님께 묻고 또 물었다.

 

수마노 보탑이 있어 비로소 사십팔방 지처가 열리고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니 정암사라 하노라

 

신라의 자장율사가 수마노탑을 세우고 정암사라 불렀다는 정암사는 태백산 줄기인 함백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적멸궁과 요사채의 두 길로 나뉘어 흐른다. 열목어가 사는 맑고 깨끗한 물이다. 함백산의 세 봉우리가 정암사를 품고 있는데 동쪽에 있는 천의봉과 남쪽에 있는 은대봉, 북쪽의 금대봉이다. 이 세 봉우리 가운데 금탑과 은탑과 수마노탑이 있다. 그러나 수마노탑만 보이고 금탑과 은탑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정암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탐심만 있고 불심이 없는 중생들 눈엔 보이지 않게 비밀하게 숨겨 놓았다고 한다. 나는 이번 생에 금탑과 은탑을 볼 수 있을까 아마 다음 생에나 가능할지 모른다.

 

단아한 선비의 아내 같은 적멸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담고 있는 수마노탑을 향해 앉아 있다. 우리나라 불교건축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처마 끝 하늘을 헤엄치는 풍경이 멀리 수마노탑까지 올라갔다가 바람을 타고 적멸궁으로 다시 내려오면서 마당에 쌓인 고요를 흩트려 놓는다. 나는 몇 번이나 적멸궁 앞마당을 돌았다. 바람은 차고 산빛도 찬데 마음은 따뜻했다. 마음이 따뜻하니 정암사와 나의 경계가 사라진다.

 

이따금 새들이 날아왔다 일없이 날아가고 처마 끝 풍경도 따라 흔들거렸다. 천 년 전 누군가도 나처럼 적멸궁 앞마당을 걸으며 고요와 대적했을지 모른다. 어디선가 하늘을 열고 날아온 새들처럼 나는 정암사에 일없이 왔다가 일없이 간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태백산을 벗어나고 정선을 빠져 나왔다. 자정을 지나 서울에 도착했지만 그러나 마음은 다시 정선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전승선 기자


전승선 기자
작성 2019.11.04 10:16 수정 2020.09.1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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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