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간세설] 진주 엘레지

이태상

 


영화로도 만들어진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의 1947년 작 단편소설 진주(The Pearl)’가 있다. 멕시코의 민속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인데 한 젊고 가난한 어부 키노가 굉장히 큰 진주를 하나 캐게 되면서 벌어지는 인생 비극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와 비슷한 실례 하나 들어보리라. 나보다 두 살 위의 작은 누이는 유학 중에 미국의 동양학자와 결혼했다. 남편은 한국주재 미 공군 근무를 마친 후 1963년 네덜란드 라이덴대학에서 몽고의 한국 침략(Korea: The Mongol Invasion)’이란 학술논문(저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인디애너대학 에서 교편을 잡다가 프린스톤대학의 첫 한국학 학자로 재직했다. 그 후로 하와이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동서문화센터의 한국학회를 창설한 미국의 대표적인 한국학자로 그는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한문에도 능통했다. 그는 한국역사(A History of Korea)’라는 영문으로 쓴 첫 한국역사책을 집필했고, () 고려대학교 총장 유진오 박사가 지어준 한국이름 현순일(玄純一)’도 갖게 됐다.

 

그동안 남편의 연구논문 집필에 내조하면서 영한 회화사전 ‘EVERYDAY KOREAN: A Basic English+Korean Wordbook’도 펴내며 바삐 지내던 누이가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시간이 좀 나자 부동산 매매 라이센스를 얻는 공부를 해 부동산 중개인 리얼토(Realtor)가 되었다. 본래 말수가 적고 빼어난 외모에다 마음 씀씀이 크고 신의가 두터우며 침착한 성품 때문인지 누이는 부동산 세일즈판매를 썩 잘했다. 부동산 중개 커미션 수수료 6%에서 소속된 브로커 회사에 3% 떼어주고 남는 3%로 누이가 한 주에 버는 돈이 대학교수 남편의 일 년 연봉보다 많아지자 남편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니면 돈에 대한 욕심이 생겼는지 저명한 학자로서의 경력과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부동산 중개업 브로커 라이센스를 취득, 누이와 같이 부동산 중개업 회사를 하나 차리게 됐다.

 

처음에는 개인주택 세일즈만 하던 누이의 평판이 좋아지자 큰 개발업자들이 경치 좋은 해변에 콘도미니엄 분양 맨션아파트 등 수백 채씩 짓기 시작하면서 그 세일즈 판매를 누이한테 다 맡겼다. 그러면 누이가 받아오는 세일즈 계약금으로 콘도 건설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큰 콘도단지, 고급별장, 호텔 등을 취급하면서 누이네 세일즈가 날로 늘어났다. 미국 본토뿐만 아니라 유럽, 남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으로부터 걸려오는 국제 전화 한 통화로 큰 덩어리 부동산 매매가 이루어지게까지 되었다. 남편은 사무실만 지키고.

 

누이가 오십여 명의 리얼토를 거느리고 백방으로 뛰었다. 이와 같이 몇 년을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뛰다 보니 누이네는 억만장자에 가까운 큰 부자가 되었다. 이토록 갑자기 돈이 많이 생기자 계모 밑에서 자라다 소년 시절 집을 뛰쳐나가 상선 선원으로 세계 각지로 돌아다닌 후 미국정부 장학금으로 명문대학을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 톱클래스 동양학자가 되었던 남편이 돈 쓰는데 신바람이 났다. 주말이면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하룻밤에 몇 만 불, 몇 십만 불, 몇 백만 불씩 날리며 놀아나기 시작했다.

 

누이는 돈 벌기에 정신없었고 남편은 돈 쓰기 바빴다. 보다 못해 남편에게 거의 모든 재산을 떼어주고 이혼한 누이는 두 아들을 키우면서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떼어 받은 재산을 몇 년 만에 다 탕진하고 알거지 신세가 된 전 남편이자 애들 아버지가 하도 가련하고 비참해 보여 인정이 많았던 누이는 다시 남편으로서가 아니고 애들 아빠로 집에 들였는데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변이 나고 말았다.

 

그 당시 영국에 살고 있던 나는 어느 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누이가 가파른 비탈길에서 누이 자신이 몰던 차에 깔려죽는 꿈이었다. 잠을 깨서 이상하다 했는데 전보를 받았다. 노모를 작은 누이가 모시고 있었기에 연로하신 어머님이 돌아가셨구나 하고 전문을 받아 본 순간 나는 기가 딱 막혔다. 꿈에서처럼 누이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통보였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장례식에도 참석치 못하고 후에 큰 누이한테서 들으니 작은 누이는 아침 일찍 애들이 다니는 호놀룰루의 명문 사립학교 푸나후(나의 큰 외조카는 오바마 전 대통령과 동급생이었다)에 데려다 주고 아침나절에 변을 당했는데, 고급 별장을 짓는 어느 바닷가 절벽으로 오르는 아직 포장 안 된 산 비탈길에서 누이는 자기가 몰던 차에 자기가 깔려 죽어 있는 것을 지나가던 행인이 오후에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1983년 일이다.

 

이 변을 당하기 전에도 작은 누이가 그 당시 콜로라도 주 덴버에 사시던 큰 누이에게 전화로 전남편 빌(William위 약칭 Bill)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것 같다고 말했었단다. 어떤 때는 작은 누이의 자동차 트렁크에 살인 독가스 같은 것을 채워놓기도 했다면서, 틀림없이 작은 누이의 전남편이 청부살인을 시킨 것 같다고 큰 누이는 나에게 말했었다.(작은 누이의 전 남편은 누이가 48세로 세상 떠난 지 10년 후 1993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삼가 두 분의 명복을 빈다.

 

오호통재(嗚呼痛哉) 오호애재(嗚呼哀哉)로다. 자본주의 물질만능의 배금사상이 팽배한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경종(警鐘)이 되리라. 하나의 돈벼락 비가(悲歌)/애가(哀歌)로서[이태상/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전명희 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9.11.25 11:49 수정 2020.09.1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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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