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시몬, 너는 좋으냐. 유명산 낙엽 밟는 소리가



유명산 휴양림 입구에서 산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어느새 서리가 내려 있다.


옅은 아침 햇살에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가을 서리꽃은 가장 극적인 아름다움의 하나다. 아주 추운 아침에는 서리꽃은 그대로 얼음으로 굳어져 한낮 동안 빛난다. 그것이 비록 상처가 될지라도 아름다움에의 유혹은 뿌리치기 힘들다.

 

계절은 벌써 겨울로 향하는 중이다. 그저 가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한 산꾼들은 아침 일찍 침묵으로 산을 오를 뿐이다.






가을의 풍경화에 빠져 산길을 오르다 발밑에서 스러지는 낙엽들의 바스락대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오는 바람에 잠시 낙엽이 남긴 진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구르몽의 시가 떠오르자 그들을 밟기가 조심스럽다. 거기에는 낙엽에 의지하는 또 다른 생물들의 고귀한 생명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산으로 오르는 길가의 잣나무들은 추위에 떨고 있다. 산길이 품은 풍경마저 잿빛인지라 산도, 사람도 고요하다. 사람들은 길만큼이나 무심한 표정으로 당장의 앞만을 바라보며 가파른 산을 오른다.


산행의 시작이 늘 그러하듯 그들의 걸음은 무겁고, 더디다.





빽빽이 들어서 하늘이 감추어진 야생의 잣나무 숲에서 거친 숨을 토하면서 무념의 시간을 따라 2시간 정도 쫓다보면 마침내 유명산 정상에 이른다.


유명산 이름에는 나름 사연이 담겨 있다. 1970년대의 어느 즈음 이 산을 오르던 등반대는 이 산에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토록 아름다운 산에 이름이 없다니. 즉석에서 당시 등반대의 유일한 여성대원 이름을 따서 이 산의 이름을 지었는데, 바로 유명(有名)산이다.






유명산은 이후 동국여지승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등 여러 고문헌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찾게 되는데, 이 산의 본명은 마유산(馬遊山)이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억새로 뒤덮인 이 너른 평원이 조선시대에는 말들이 뛰어놀던 군마 사육장이었단다. 뒤늦게나마 양평군에서는 지명을 마유산로로 개명하고, 산 이름도 마유산으로 바꿔서 부르고 있다.

 

정상 전망대에 서면 어비산(822m) 너머로 좌로부터 용문산 정상(1157), 장군봉, 백운봉(940m)으로 장쾌한 마루금이 펼쳐진다. 오른쪽 산줄기가 끝나는 곳에 남한강이 아득하다. 저 강물은 얼마가지 않아 양수리의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만나 몸을 합칠 것이다.

 

 

 


정면에 있는 어비산(漁飛山)은 아주 오래전 옛날, 홍수 때가 되면 물고기들이 산을 넘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근처의 배너미재는 '배가 넘어 다니던 고개'란 의미를 담고 있다. 산에 무슨 배가 있어 배너미재인가 하겠지만, 큰물이 났던 그 옛날 어느 시절에는 이곳이 호수였다는 설화 하나쯤은 품고 있는 셈이다.

 

정상에서 입구지 계곡으로 내려선다. 협곡 양옆으로 험상궂고 기세등등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서있고, 가파른 숲에는 ()과 등나무()가 복잡하게 얽혀 갈등(葛藤)을 이루고 있다. 세상사 갈등은 복잡한 사정으로 서로 화합하지 못하지만 숲에서의 갈등은 식물나라 호스피스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물가 나무들 중 몇몇은 졸면서 자랐는지 비스듬히 누어있다. 계곡에는 너럭바위를 깔고 비스듬히 누운 폭포들이 눈에 띤다. 장고의 세월동안 흐르는 물이 치성 올리듯 깎아내고 닦아낸 바위틈으로 깊은 도랑이 생겼다.

 

입구지 계곡의 온갖 나무들은 바람을 핑계 삼아 가지를 흔들고 낙엽을 떨궈내는데 여념이 없다. 한해 막 내림을 준비하는 가을의 마지막 표정들이다.


적막한 늦가을의 계곡에 살아 있는 소리는 오직 물소리와 새소리뿐이다. 골짜기가 너무 깊어 바람조차 들지 않고 바람과 놀아주던 잔가지들도 어디론가 흩어지고 없다.


바람은 앙상한 계곡에서 외롭다.

 


 


 

입구지 계곡에 잔도처럼 난 산길은 거친 돌길이다. 발끝에 닿는 촉감은 계곡물처럼 차갑고 서늘하다. 단풍과 바람마저 사라진 깊은 계곡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은 오로지 계곡을 흐르는 물뿐이다. 도도히 흐르는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위세에 산은 잔뜩 웅크리고 있고, 산꾼들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다.

 





휴양림으로 돌아오자 어느새 하늘의 언저리가 붉어지려한다. 이제 우리의 산행도 마무리할 시간이다.

 

텅 빈 주차장 위를 나르는 새들에게서 새삼 자유를 발견한다. ‘자유(自由)는 자기(自己)가 살아가는 이유(理由)’라는데, 비록 날지는 못하지만 두 발로 자유롭게 주유할 수 있거늘,


우리 역시 충분히 자유롭지 아니한가.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9.11.29 10:05 수정 2019.11.29 10:15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편집부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