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간세설] 경애하는 김찬선 신부님께

이태상

 


안녕하십니까.

저는 글로벌 인터넷 신문 '코스미안뉴스' 회장 이태상이라고 합니다. 한 달 후면 만으로 83세가 되고 현재 미국 뉴저지주 Tenafly 라는 동네에 살고 있지만 젊은 날 한 때 한국일보 자매지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 기자 출신으로 오늘까지도 고향 같은 한국일보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으면서 특히 '삶과 문화' 고정칼럼에 쓰시는 더할 수 없이 순수하고 향기로우며 신선한 김 신부님의 진주 아니 무지개 같은 글을 애독하는 독자의 한 사람입니다.

 

20191129일자 한국일보 본지에 실린 김 신부님의 칼럼 글 '존중해 줄 수 없는 선택의 자유'를 오늘 아침 읽고 김 신부님의 고견에 '이견(異見)'을 제기해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길 없어 이렇게 삼가 이 '공개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겐 그 누구에게나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본질적으로 신과 짐승의 튀기라고 할 수 있는 인간에겐 각자 스스로를 신격(神格)으로 업그레이드(upgrade) 할 수도 수격(獸格)으로 다운그레이드(downgrade)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김 신부님께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사요 이스라엘의 순교사라 할 수 있을' 마카베오스에서 '남자와 여자를 대표하는 두 인물'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셨지요.

 

"하나는 엘아자르라는 노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먹어서는 안 되는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받지만 거부합니다. 이에 그를 회유하려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어도 되는 다른 고기를 주며 그것을 먹으면 살 수 있을 거라고 하는데, 그는 그런 식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노인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며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며 죽어갑니다. 다른 하나는 일곱 아들을 둔 어머니로서 이스라엘의 신앙 때문에 아들을 하루 사이에 다 잃게 되는데도 어떻게든지 살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감히 죽으라고 용기를 북돋는 말을 하고 실제로 일곱 아들이 차례로 죽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이어서 김 신부님께서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님께서 안 의사가 돌아가시기 전에 쓰셨다는 아래와 같은 편지를 인용하셨죠.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하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위에 옮긴 글을 읽으면서 저는 너무도 비통하고 분통하며 너무 너무 한심스러워 기가 차다 못해 막혀버릴 것만 같습니다. 이 얼마나 오도(misguided)되고 잘못 세뇌된 '사상''신앙'의 비극이며 참극인지 참으로 기절초풍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우선 우리가 좀 큰 그림에서 보자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 아니 숨을 멈춘듯 한 모래 한 알, 빗방울 하나, 눈꽃 한 송이, 구름 한 조각, 바람 한 점, 낙엽 한 잎, 모든 무생물까지도, 대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들이라면 우리 동양 선인들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너와 나 따로 없이 '피아일체''물아일체'가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아무리 미화하고 정당화 한다 해도 극히 미세한 소인배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애국심/애족심'이다 아니면 '신념/신앙'이다 '윤리/도덕'이라는 것이 그 사회와 그 시대상황에 따라 안전인수의 인위적으로 조작해온 너무도 터무니없이 억지스러운 개념들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례막심한 표현이 되겠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저는 신부님이나 수녀님 그리고 비구와 비구니라는 남녀승려 스님들에게 마치 너무 부자연스럽게도 거세당한 '내시(內侍)'에게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무한한 긍휼지심이랄지 측은지심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순교자''독립투사''애국지사'다 불리는 이스라엘의 엘아자르라는 노인이나 한국의 청년 안중근 의사나 그 누구라 할 것 없이 이차대전 당시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나 최근에 있어온 이슬람 자살 특공대로 희생된 수많은 젊은이들처럼 계속되는 '십자군'의 무지몽매한 제물들이 아니겠습니까.

 

아직까지도 동양에서 높이 칭송되어오고 있는 '효도'란 것도 우리나라 심청이를 비롯해, 물은 언제나 아래로 흐르듯 '내리사랑'이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끔찍한 만행이고, 타고난 성()의 소유자 성인(性人)으로서 인부(지아비人夫/아비人父)노릇도 안하면서 어찌 성직자(聖職者)로서의 신부(神父)라 자처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신다운 신이 정말 있다면 신이 신기(神氣)가 딱 막혀 죽어버릴 일이지요.

 

동서고금 인간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계에서도 영어로 표현해서 The Bottom Line'Sink or Swim'이라고 '적자생존'이자 '약육강식'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우주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카오스 같은 세상에서도 코스모스를 피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201631일 자연과인문에서 나온 우생의 졸저 '사상이 아니고 사랑이다'의 여는 글 '진주'에 저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상이 아픔이라면 사랑도 아픔이다.

머리가 아픈 게 사상이라면 가슴이 아픈 게 사랑이다.

사상은 착취와 살생의 괴로움을 주는 아픔이지만

사랑은 양육과 양생과 희생의 기쁨을 주는 아픔이다.

세상의 모든 싸움과 다툼이 서로 다른 사상 때문이라면

사랑은 모든 슬픔과 아픔을 치유하고 평화를 가져온다.

사상은 우리를 갈라놓지만

사랑은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사상은 우리에게 서로의 다른 면만 보여주지만

사랑은 우리에게 서로의 같은 면을 보여준다.

사상은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고 우리를 세뇌시키지만

사랑은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고 우리를 깨우쳐 준다.

사상은 카오스를 불러오지만

사랑은 코스모스를 피우리라.

 

제가 좀 조숙했었는지는 몰라도 열 살 때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바다'라는 동시를 하나 지어 80여 년을 두고 지금껏 밤낮으로 주문처럼 외어 왔습니다.

      

바다


영원과 무한과 절대를 상징하는

신의 자비로운 품에

뛰어든 인생이련만

어이 이다지도 고달플까


애수에 찬 갈매기의 꿈은

정녕 출렁이는 파도 속에

있으리라


인간의 마음아

바다가 되어라

내 마음 바다가 되어라


태양의 정열과

창공의 희망을 지닌

바다의 마음이 무척 부럽다


순진무구한 동심과

진정한 모성애 간직한

바다의 품이

마냥 그립다


비록 한 방울의 물이로되

흘러흘러 바다로 간다

 

그리고 또 소년 시절 우리 모두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을 '코스모스'란 노래를 지어 여태껏 사시사철 불러오고 있습니다.

 

코스모스

 

 

소년은 코스모스가 좋았다

이유도 없이 그저 좋았다

소녀의 순정을 뜻하는

꽃인 줄 알게 되면서

청년은 코스모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철이 들면서 나그네는

코스미안의 길을 떠났다

카오스 같은 세상에서

코스모스 같은 우주를 찾아서

 

그리움에 지쳐 쓰러진 노인은

무심히 뒤를 돌아보고

빙그레 한번 웃으리라

걸어온 발자욱마다

무수히 피어난

코스모스바다를 발견하고


무지개를 좇는

파랑새의 애절한 꿈은

정녕 폭풍우 휘몰아치는

저 먹구름장 넘어 있으리라.

무지개를 올라 타고

코스모스 하늘로 날아보리라

 

 

망언다사(妄言多謝)

 

 

2019121

미국 뉴저지주 테너플라이에서

이태상 드림

 

 

 


편집부 기자
작성 2019.12.02 10:28 수정 2019.12.02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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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