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산사기행] 설악산 백담사





설악산 백담사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고백한다. 나의 기도는 완전하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평상심을 얻지 못했으며 내 유전자의 에너지와 합일하지 못했다. 사유의 절대량은 극대치를 이루었으나 세상과 강력하게 연동되는 시스템은 작동하지 못했다. 나는 한 생명의 에너지를 위해 종로와 목동을 오가며 기도했지만 나의 기도는 완전하지 않았다. 나는 고백한다. 나의 유전자가 한 생명으로의 진화를 멈추고 다시 우주로 되돌아갈 때 나는 여전히 평정심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평정심에 도달하지 못한 나의 기도는 진실했지만 그 진실의 결과는 인과연의 한계를 넘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나는 무엇이었을까. 평정심에 도달하지 못한 나의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은 무엇이었기에 나는 평정심 하나도 얻지 못한단 말인가. 그저 우주의 법칙을 복사해서 나에게 붙여 넣기를 한 것에 불과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라는 생각의 감옥에 갇힌 나를 구출해야 한다. 차단된 에너지의 출구를 열어 놓아야 한다.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나는 시간의 기억에 있는 의 허구이다. 그러므로 어떤 진리의 힘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진리도 시간의 기억에 있는 허구이기 때문이다.

 

나의 고백은 허구가 아니라 실존이다. 실존의 고백은 기도라는 매개체를 통해 나를 구성하고 내 삶의 한 부분을 넘나들었지만 스스로 우주의 질서로 편입되었다. 그래서 명쾌하다. 나는 이런 명쾌한 질서의 본성을 경외한다. 그러므로 나의 기도는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진실했고 평정심을 얻지 못했지만 실존이었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명쾌한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고 다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명쾌한 일상으로 돌아와 백담사로 고백여행을 떠났다.

   

나는 강원도 길을 유난히 좋아한다. 설악을 담고 있는 현리의 내린천 상류에는 리프팅을 즐기는 젊은이들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여름은 젊은이들의 함성에서 완성되는 것 같았다. 내리치는 물과 하나가 된 젊은이들의 함성을 부러워하며 은비령에 닿았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은비령엔 스승님이 산문을 걸어 잠그고 수행정진하고 계신 곳이다. 나는 멀리서 스승님의 안부를 마음으로 물으며 은비령 골짝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은비령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쏟아지는 별들을 보며 떠나온 서울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 이처럼 고요하고 이처럼 적멸한 곳에서 산다면 그 얼마나 좋을 일인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 마가리로 가서 살자던 백석처럼 나도 이곳 은비령에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싶었다. 잊을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는 마음의 궁극에 도달하고 싶었다. 은비령에서 나의 고백은 진심이었다.

 


 

밤새 이슬이 내렸다. 내린천의 물들은 어깨를 맞대고 찰찰찰 흘렀고 일찍 일어난 새들은 은비령을 넘어 저 내설악까지 왔다 갔다 했다. 나는 짐을 꾸려 다시 은비령을 내려와 설악을 떠돌다가 인제 백담사에 닿았다. 여름은 백담사에서 더욱 강렬한 열정을 퍼 붓고 있었다. 만해가 도를 닦고 일해가 속을 침묵하던 백담사의 역사가 사뭇 어울리지 않다고 속으로 웃고 있는데 발소리도 들리지 않게 걸어가시는 스님의 가사장삼을 바람이 휘감고 갔다. 분별없는 바람이 나보다 낫다. 스님의 가사장삼을 어루만지는 바람이 부처인지 모른다.

 

깊고 깊어서 더 아름다운 절 백담사를 몇 번이나 왔었지만 나는 아직도 백담사 앞을 흐르는 계곡 위에 쌓아 논 몇 천개 돌맹이탑의 사연을 다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사연들이 쌓이고 쌓여 간절함으로 빛나는 저 고독을 어찌 알 수 있을까.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을 쓴 만해의 고독도 저처럼 간절함으로 빛났을 터인데 어찌 그 간절함을 내가 알 수 있을까.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 쳐서 사라져간 만해의 님의 침묵을 나는 지금도 다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백담사는 늘 내게 고독한 고백이다.

 

번뇌를 털어낸 운수납자가 찾아들기에 좋은 백담사는 승속을 넘나들던 매월당 김시습도 유별히 사랑했던 곳이다. 세조에게 밀려난 단종을 측은히 여겨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 속에서 살다가 이곳 백담사에 시를 지으며 중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시가 새겨진 바위가 백담사 마당에 덩그러니 놓여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잡고 있다. 운수납자들의 번뇌를 털어내던 백담사의 시간들은 얼마나 많은 사연을 담아두고 있는 것인지 헤아리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마음은 언어의 옷을 입고 입술을 뛰쳐나온다. 나는 살아가면서 간신히 알게 되는 마음에게 순연한 기쁨을 선사하고 싶었다. 백담사 부처님 앞에서 언어의 옷을 입고 입술을 뛰쳐나온 마음의 고백은 그래서 순연하다. 완전하지 않아서 순연하고 견고하지 않아서 순연하다. 나는 마음을 사랑하는 법 하나를 고백이라는 기도의 그릇에 고이 담아서 백담사를 내려왔다.

 






전승선 기자
작성 2019.12.09 09:21 수정 2019.12.09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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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