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가를 꿈꾸던 고등학생 시절, 이광수의 ‘유정’을 읽고 소소한 연애사보다 주인공 최석이 친구 N에게 보낸 편지 속 바이칼 호수의 신비스러운 모습만 상상하면서 늘 그리워한다. 또 시인 백석의 시 ‘북방에서’는 잃어버린 북방민족의 향수를 자극하니 이는 피가 끓는 청년의 불난 가슴에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 된다. 춘원을 따라 톨스토이를 좋아하여 ‘전쟁과 평화’를 읽고 갖게 된 동토의 땅 시베리아에 대한 막연한 환상들. 이런 감정들은 얽히고설켜 바이칼에 대한 향수는 세계 최고 수심을 지닌 바이칼 호수의 심연만큼 깊어만 간다.
세계지도를 펼치면 시베리아 벌판 한가운데에 서늘한 푸른색으로 길게 뻗은 바이칼호수를 보면서 파란 눈의 여인이 고혹적인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뜨는 순간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바로 ‘푸른 눈동자의 바이칼’이다. 바이칼 앞에는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가장 깊고, 가장 푸르고, 가장 차갑고, 가장 담수량이 많고, 가장 오래된 호수다.
바이칼의 도시 이르쿠츠크는 이곳으로 유배 온 120여명의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들이 만든 도시다. 프랑스 파리까지 진군한 러시아 청년귀족장교들이 서유럽의 자유분방한 선진문화와 진보된 시민의식에 큰 충격을 받고 러시아로 돌아와 농노를 해방하고 왕정을 전복시킬 계획으로 1825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실패하게 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동토의 땅인 이곳으로 유배오게 된다. ‘전쟁과 평화’ 에 나오는 발콘스키 백작은 실존 인물로 쿠데타 주동자인데, 수형 생활이 끝나자 모스크바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서 데카브리스트들과 함께 브라트족의 도시 발전을 위해 헌신하면서 여생을 마친다. 그의 저택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르쿠츠크에서 290km 거리인 바이칼호수의 알혼섬을 향해 출발한다. 서울은 38도의 염천이지만 이곳은 초가을 날씨다. 시내를 벗어나자 광활한 초원의 스텝지대가 시작된다. 바이칼로 가는 길은 뜨거운 태양 아래 자작나무로 만든 러시아 전통 목조 가옥, 자유방임형 소떼가 노니는 끝없는 초지가 끝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짙은 타이가숲, 분홍색 이반차이 야생화가 끊임없이 펼쳐진다. 이런 환상적 파노라마가 4시간 동안 수없이 반복되어도 지루하지 않다.
버스는 타이가 숲을 헤치고 질주한다. 백석의 시 ‘북방에서‘ 중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는 것을 기억한다.’ 라는 싯구는 과거 북방민족으로서의 향수를 자극한다. 우리는 왜 이 나무들을 버려두고 떠났을까? 지금 이 자리에서 비로소 시에 담긴 백석의 심경을 이해한다. 샤먼의 제사의식에 사용되는 바이칼의 자작나무는 땅과 하늘의 매개체다. 우윳빛 살갗위에 상처처럼 난 거뭇거뭇한 속살은 신께 나약한 인간을 구원해 주십사하는 증표로 느껴진다.
드디어 지구의 태반인 바이칼호수에 도착한다. 바이(bai)는 풍요, 갈(gal)은 바다를 의미한다. 부두에서 바지선을 타고 숱한 인종들에 섞여서 바이칼을 건너 알혼섬으로 들어간다.
2,500만년 나이를 먹은 바이칼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남한의 1/3 크기다. 남북 636km, 둘레 2,200km, 최고수심 1,742m, 지구 담수의 20%를 지니고 있다. 여행이 끝나기 전까지 과연 이곳에 서식하는 물범 네르파를 볼 수 있을까. 6만 마리로 추정되는데 갈수록 개체수가 감소하고 있다. 호수는 12월부터 결빙하면 5월까지 얼어있어 배는 운항하지 못하고 10인승 4WD 우아직이 여행객을 나른다. 약 10분 남짓 걸려 제주도 절반 크기의 알혼섬에 도착한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