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연말특집-그 쓸쓸함에 대한 추억, 동춘 서커스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의 어느 날, 친구들과 대부도 해솔길을 트레킹하기 위해 차를 타고 대부도 구봉산을 향해 출발한다. 대부도 방조제를 지나 읍내 쪽으로 들어가던 중 도로 좌측으로 대형 천막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동춘서커스 상설공연장이라고 적힌 간판을 보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벌렁거리면서 50년 전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그때 그 시절은 마을에 서커스단이 들어오면 동네 전체가 잔치 분위기로 술렁거렸다. 피에로 복장을 한 난쟁이와 원숭이, 짙은 화장을 한 곡예사들이 트럼펫과 북소리에 맞춰 거리를 누비면 동네 조무래기들도 따라 가면서 율동에 맞추어 춤추고 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볼거리가 귀하던 시절에 서커스는 환상의 종합예술이었다. 그 시절 서커스단은 곡마단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이 무대에서 벌이는 마술, 동물 곡예, 노래, 신파조의 연극은 삶에 지친 서민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황홀한 선물이었다. 지상 곡예는 아슬아슬하고 하이라이트인 공중곡예는 짜릿한 전율로 다가왔다. 외줄과 그네를 타는 소녀는 연민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때로는 실수를 하지만 오뚝이처럼 바로 일어나 맡은 역할을 계속하는 모습은 우리네 인생과도 많이 닮아있었다.


임시로 설치된 대형 천막 속으로 가족들과 손잡고 들어가면서 천막 속으로 사라지는 친구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천막과 천막이 겹치는 곳으로 몰래 들어가려다 붙잡혀 나오는 동네 형은 험상궂게 생긴 경비에게 끌려 나와 엎드려뻗쳐 하고 있는 모습에 박장대소했던 그 시절의 자화상들.

 

그런데 서커스에 대해 좋은 추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곡마단의 어른들이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데려다가 밥 짓고 빨래하고 물 길어 나르게 하면서 학대하고 무자비하게 곡예훈련을 시킨다는 소문이 나돌아 곡마단은 비극의 공연장이요 유형자의 유배지처럼 다가오게 된다. 결국 어린 시절 나에게 감동과 상처를 동시에 준 나의 문화유산은 자연스럽게 내 뇌리에서도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읽은 소설 하나가 사라졌던 서커스의 추억을 다시 끄집어낸다. 1970년대 급격한 산업화를 겪던 시기에 유랑민들 집단인 곡마단의 생태를 연민과 애정의 마음으로 묘사한 소설, 한수산의 부초(浮草)’. 제목처럼 떠다니는 풀과도 같은 일월 곡예단단원들의 가난한 삶과 동지애와 사랑을 소박하고 솔직하면서도 재미있게 묘사한 이 책을 밤을 새며 읽어 내려갔다. 작가는 산업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소외된 집단의 삶을 동병상련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어 작품 전체에는 애조(哀調)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시대의 풍파에 자연스레 스러져가는 소외계층들의 목소리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한수산의 수작이다.

 

친구들과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으로 예매를 하고 바로 뒷날 집 사람과 같이 대부도로 다시 간다. 몇 년 전 잠실경기장에서 본 태양의 서커스에 감동받은 집 사람은 천막 안의 시골 서커스는 눈에 차지 않는 지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따라 나선다.

 

동춘서커스단은 1925년 일본인 서커스단 직원이었던 동춘 박동수 씨가 창단한 대한민국 최초의 서커스단이다. 남성남, 남철, 서영춘, 백금녀, 이봉조, 장항선, 배삼룡, 이주일 등 쟁쟁한 스타들을 배출한 등용문 역할도 했다. 당시 호황을 누리던 서커스단은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산업의 성장에 밀려 사양길로 접어들게 된다. 서커스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자 부초처럼 떠돌던 곡예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약장수를 따라다니며 묘기를 부리거나 밤무대 등 천막 밖 의 삶을 찾아 떠나 버린 것이다.

 


 

경기도 안산 대부도 해변에 마련된 상설공연장 주변은 황량하다. 대형 천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적막이 감돈다. 안락한 극장식 좌석은 반 정도 밖에 차지 않았다. 이탈리아 영화 감독 펠리니의 영화 <>에 나오는 늙은 곡예사 잠파노의 눈물과 그의 조수 젤소미나의 슬픈 미소를 기대하면서 공연에 집중한다.

 

무대 조명이 켜지자 남자 곡예사 열 명이 나와 나란히 세운 두 개의 기둥에 원숭이처럼 잽싸게 올라 묘기를 보여준다. 공과 모자 저글링, 길게 늘어뜨린 두 개의 붉은 천을 잡고 남녀가 펼치는 환상의 고공 춤, 두 발로 무거운 도자기 독 굴리기, 얼굴 마스크와 의상이 한꺼번에 바뀌는 변검(變臉), 5명이 의자에 올라 물구나무 서기 등 1시간 20분 정도 이어진다. 디지털 시대에 부합하는 이미지 변신과 예술성과의 융합, 무대시설과 조명, 배경음악도 수준급이다. 그런데 몇 년 전 중국 상하이에서 보았던 중국 서커스와 연기 종목, 복장, 동작 등이 너무 흡사하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 아침 서커스 공연장을 찾은 나이 든 사람들은 무대 위 곡예사들의 몸짓에 환호하고 손뼉을 친다. 보다 세련되고 진화된 연기를 보면서 옛 서커스에 대한 향수를 찾고자 하지만 둘 사이의 간극이 있음을 결국 인정하고 만다. 과거와 현실, 좁혀지지 않는 두 기둥 사이에 걸린 외줄을 타는 젊은 곡예사의 모습에서 아련한 향수도 애틋한 추억도 묻어나지 않는다.

 

곡예사 대부분이 중국인들이다보니 전체적인 공연 분위기도 중국풍으로 흐른다.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도 곡예사 30명 중 25명이 중국인이라고 한다. 극한직업이기 때문에 배우려는 사람이 드물어 한국인 단원이 감소하고 있다 보니 중국인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동춘서커스가 없어지면 공연 단체 하나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서커스라는 장르 하나가 우리나라에서 사라지는 현실보다는 낫지 않은가.


제일 먼저 생겨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동춘서커스가 한편으로 대견스럽다.

 

 

 

울어봐도 소용없고

후회해도 소용없는

어릿광대의 서글픈 사랑

 

공 굴리며 좋아했지

노래하면 즐거웠지

흰 분칠에 빨간 코로 사랑 얘기 들려줬지

 

곡예사의 첫사랑은 곡마단 트럼펫과 큰 북 장단으로 시작되는데, 가수 박경애는 특유의 볼륨 넘치는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소녀 곡예사의 슬픔을 노래한다.

 

그 쓸쓸함을 느껴보는 것은 이제 어려울 듯하다.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19.12.27 11:07 수정 2019.12.27 14:34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편집부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