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산세설] 경애하는 이어령 선배님께

이태상

 


20191224일 자 중앙일보 뉴욕판에서 강혜란 기자님의 이어령의 생각들이 문화유전자처럼 퍼진다면 그게 희망기사를 읽고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서울 문리대 종교학과(1955-1959)를 다니면서 국어 국문학과 선배이신 선배님과 가까이했던 이태상입니다. 한동안 음악감상실 다방에 처박혀 긁적여 본 소설 (가제: 자학의 행로) 원고 앞부분을 선배님께 보여드렸었죠. 그랬더니 선배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가 쓴 글에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괴테, 헤세, 카뮈,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단테 등 세계 문학 거장들이 그들 작품에 담은 내용이 다 들어있지만, 전혀 요리가 안 되어 있으니 살도 붙이고 양념도 쳐서 독자가 즐겨 읽고 잘 소화할 수 있도록 다시 써보라는 조언을 해주었지요.

 

하지만 그 당시 저로서는 그럴 재주도 없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아 작가되겠다는 꿈에서 깨어나 나는 인생이란 종이에 삶이라는 펜으로 사랑의 피와 땀과 눈물을 잉크 삼아 그리움에 찬 그림과 글을 그리고 써보리라작심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천방지축 돈키호테 못지않게 독불장군처럼 목숨을 건 일인구국거사까지 도모했다가 수포로 돌아간데다 설상가상으로 첫사랑에 실연당해 동해 바다에 투신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요.

 

그 후로 영자신문 코리아헤럴드를 거쳐 코리아타임스 기자 시절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계시던 선배님을 조선일보 구내식당에 있는 다방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잠시 해본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이색주점 대폿집 해심(海心)’을 경영하다가 다시 미국 대학교재 출판사 한국과 영국 대표 일을 했습니다. 현재는 미국 뉴저지주 Tenafly라는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암 투병이 아닌 친병(親病)’ 중이시라는데 저도 10여 년 전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저 또한 친병 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제넘게 동병상련이라 해야 할까요. 최근 우제가 창간해서 회장으로 있는 글로벌 인터넷 신문 코스미안뉴스에 기고한 졸문 하나 선배님과 나누고 싶어 아래와 같이 옮겨드립니다. 망중투한으로 일독해주십시오.

 

큰 그림에서 보자(II) : 죽음을 사랑해야 삶도 사랑할 수 있지

 

 

모차르트가 1787422일 그의 나이 서른한 살 때 그의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우리 한 번 같이 읽어보자. (이 편지글은 1864년 출간된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서한집에서 옮긴 것이다.)

 

지난번 편지에 안녕하신 줄 알고 있었는데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는 이 순간 몹시 놀라고 걱정됩니다. 제가 언제나 최악의 사태를 예상하는 버릇이 있지만, 이번만은 어서 빨리 아버지께서 쾌차하신다는 보고를 받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잘 좀 생각해 볼 때 죽음은 우리 삶의 참된 행선지임으로 저는 진작부터 우리 인간이 믿을 수 있는 이 좋은 친구와 친하게 지내왔기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이 놀랍거나 무섭지가 않을 뿐만 아니라 되레 가장 평화롭고 큰 위안이 되며(제 말을 이해하시겠죠) 이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우리의 진정한 지복감(至福感)의 열쇠임을 내가 깨달아 알 기회를 주신 나의 하늘 아버지에게 감사해왔다는 말입니다. 제가 아직 젊지만,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생각 안 하는 때가 없습니다. 내일 새벽이 밝기 전에 나라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는지 모른다는 것을요. 그런데도 나를 아는 아무도 나를 접촉해 사귀면서 내가 한 번도 침울해한 적이 있더라고 말할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지요. 이처럼 내가 언제나 밝고 명랑하게 행복한 성정을 갖게 된 데 대해 저는 날마다 저의 창조신께 감사하면서 모든 세상 사람들과 피조물들이 다 나처럼 늘 행복하게 삶을 즐기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I have this moment heard tidings which distress me exceedingly, and the more so that your last letter led me to suppose you were so well; but I now hear you are really ill. I need not say how anxiously I shall long for a better report of you to comfort me, and I do hope to receive it, though I am always prone to anticipate the worst. As death (when closely considered) is the true goal of our life, I have made myself so thoroughly acquainted with this good and faithful friend of man, that not only has its image no longer anything alarming to me, but rather something most peaceful and consolatory; and I thank my heavenly Father that He has vouchsafed to grant me the happiness, and has given me the opportunity, (you understand me) to learn that it is the key to our true Felicity. I never lie down at night without thinking that (young as I am) I may be no more before the next morning dawns. And yet not one of all those who know me can say that I ever was morose or melancholy in my intercourse with them. I daily thank my Creator for such a happy frame of mind, and wish from my heart that every one of my fellow-creatures may enjoy the same.)”

 

예수도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되다.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다라고 했고, 이순신 장군의 생즉사(生即死) 사즉생(死即生) 필사즉생(必死即生) 필생즉사(必生即死)’도 있지 않은가. 우리 상상 좀 해보자.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늙지 않고 영원히 젊다고. 그러면 사는 것도 젊은 것도 아니리라. 그래서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만(Walt Whitman)도 그의 시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에서 이렇게 읊었으리. “죽는다는 것은 그 어느 누가 생각했던 것과도 다르고 더 다행스런 일이리라.(To die is different from anyone supposed, and luckier.)”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극작가 제임스 매튜 배리(Sir James Matthew Barrie)도 그의 작품 피터 팬(Peter Pan)’에서 죽는다는 건 엄청 큰 모험 (To die will be an awfully big adventure.)”이라고 했으리라. 그러니 모차르트 같이 죽음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삶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1972년 문단의 우상 파괴를 주창하며 월간 문학사상을 창간하신 선배님의 큰 뜻을 이어받아 2018710일 우제도 글로벌 인터넷 일간 신문 코스미안뉴스를 창간해 지구촌의 모든 허깨비를 일소하고 온 인류가 사랑의 무지개를 타고 지상에 내려와 잠시 머무는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으로서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계몽하고자 진력하고 있습니다. 선배님께서도 적극 동참, 지지, 후원해주시기를 앙망해 마지 않습니다.

 

즐거운 연말연시 보내시고 새해에도 날로 건승하시길 축원합니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19.12.28 11:12 수정 2019.12.28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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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