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산사기행] 강남 봉은사




강남 봉은사

 

결혼, 욕망을 욕망한다. 결혼은 욕망의 정석이다. 본능에 옷을 입힌 결혼이라는 제도로 오늘 또 한 쌍의 남녀는 존재감의 정점에 섰다. 나는 서른 중반에 들어선 사촌조카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발산동 웨딩홀에 갔다. 선남선녀의 행복한 결혼식은 그동안 못 봤던 친척들을 보는 기회가 되었고 서로의 삶에 대해 잠깐이나마 관심을 둘 수 있었다. 어느새 더 늙어버린 어르신들과 몰라볼 정도로 커버린 아이들은 존재의 변화를 실감나게 했다. 결혼식이 끝난 발산동에서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월은 결혼과 욕망 사이에서 존재의 울타리는 치고 나는 사월의 향기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전철을 타고 있었다. 5호선 전철은 젊은 여인의 하이힐처럼 거침없이 지하를 달렸다. 5호선에서 나는 결혼의 종착까지 가보지 못한 아쉬움 따위는 개나 줘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입가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을 실룩거렸다. 그러다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영화를 떠올리며 또 웃다가 앞에 앉은 고단해 보이는 노부부의 눈빛과 마주쳤다. 자세히 보니 노부부의 주름진 눈빛은 형형했다. 고단하지만 맑고 아름다웠다. 나는 방금 실없이 웃었던 웃음을 거두고 저 고단하고 아름다운 노부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여의도역에서 9호선으로 갈아탔다.

 

토요일 오후, 사월의 햇살은 봉은사 마당위로 동글동글 내렸다. 강남 빌딩숲에 갇힌 봉은사의 풍경은 도시의 위안으로 남아 있었다. 초과된 용량의 뇌를 비우는 비밀번호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봉은사의 사월은 도시의 염치를 찾기에 충분했다. 나풀거리는 도시남녀의 발걸음은 봉은사에서 나비가 되고 나는 토요일 오후의 여행이 봉은사에서 완성됨을 즐거워했다. 변화의 중심에 있는 도시로부터 봉은사는 천년의 시간을 향유하는 가장 매력 있는 강남스타일이다. 강남은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강남 스타일로 귀결되고 문화콘텐츠를 생산해 내는 부와 명예의 전당이지만 봉은사라는 콘텐츠는 그 중 으뜸이 아닐까 생각하며 우뚝 선 빌딩숲을 바라보았다.

 

저 수많은 빌딩에는 누가 사는 것일까. 서울에 땅 한 평 없다고 어떤 이가 설음을 토로하자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나는 송곳 꽂을 땅도 없다고 했다. 그러자 지나가던 스님이 나는 송곳도 없다고 했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탄핵정국이 끝나고 대선레이스가 벌어지고 있는 지금 봉은사에는 우르르 몰려드는 대선주자들의 발걸음 소리만 경내에 요란하다.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그렇지 않던가. 저 우뚝한 빌딩처럼, 저 고요한 대웅전 풍경처럼 강남은 강남스타일로 완성되고 나의 산사순례는 봉은사에서 활짝 핀 벚꽃이 된다. 봉은사의 사월은 나에게 벚꽃이다. 욕망의 정석이다. 본능이라는 옷을 벗고 햇살 아래 선 벚꽃나무다. 토요일 오후를 온전하게 사랑한 감각의 제국이다.

 

봉은사는 여러 번 왔었다. 강남에 올 일이 있으면 봉은사에 들러 아무 생각 없이 마당을 걷거나 무심하게 빌딩숲을 바라보곤 했다. 거기 봉은사가 있어서 좋았다. 마치 숲속에 옹달샘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맑고 시원한 옹달샘의 물을 한 바가지 퍼서 쭉 들이키면 영혼까지 맑아지는 것 같은 그런 봉은사에서 나는 도시를 사랑하지 못한 것을 뉘우쳤다. 몸을 통해서 마음으로 가는 것이 수행인 것처럼 도시를 통해서 자연으로 가는 길을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항상 단절하려는 것도 없고 항상 하려는 것도 없는 그 상태를 나는 가 닿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햇살은 내리고 사람들은 도란도란 경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라의 절 봉은사에 무심히 흐른 천년이 대웅전 처마 끝으로 이어지는데 말년에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예술의 혼을 품고 불교에 몰두한 추사가 떠올랐다. 죽기 몇 달 전인 1856년 여름이 한창일 때 아예 봉은사에 들어와 살면서 판각불사에 온 힘을 쏟았다는데 지금도 봉은사 판전의 편액에는 板殿이란 추사의 글씨가 무심하고 순수한 듯 예스럽고 소박하게 걸려 있다. 1939년 대화재 때에도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판전 안에는 남호스님이 판각한 화엄경판이 빼곡히 차 있고 판전 내부 왼편 벽에는 불화 신중탱이 한 점 걸려있다. 추사와 우정을 나눴던 초의선사가 봉은사에서 같이 기거하며 불교에 대한 마지막 열정을 불태웠던 추사의 작품이 신중탱이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전해진다.

 

세상 설명할 그 무엇 있으랴. 부처는 룸비니에서 태어나 당나라로 왔다. 그리고 다시 신라로 왔고 여기 강남 봉은사로 왔다. 잡생각에 끄달려 나가는 곳이 사바세계라면 생각 없는 곳이 극락 아니던가. 나는 영산전 댓돌에 앉아 지나가는 바람에게 마음을 맡기고 잠시 명상에 들었다. 마음이 고요하니 세상이 고요하다. 바람에게 잠시 맡겨 논 마음이 돌아오기 전에 저 빌딩숲의 땅 한 평을 내려놓고 욕망을 욕망한 하잘 나위 없는 나를 반성했다. 그러나 강남스타일로 빛나는 강남의 욕망은 강남에서 아름답고 나는 종로에서 종로스타일로 아름다운 욕망을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돌아온 마음을 몸속에 넣었다. 욕망은 업을 씻는 세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주라는 하드웨어가 그렇게 인간에게 설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과 업은 손과 손바닥처럼 한 몸일 것이다. 무지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음이 생기면 온갖 존재가 살아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존재가 사라진다.

 

찬찬히 내리는 봄볕을 몸속까지 받고서 나는 봉은사를 나와 친구가 있는 잠실로 향했다. 교회에 다니는 친구는 부활절 준비로 무척이나 바쁘다면서도 주막으로 달려와 함께 막걸릿잔을 기울였다. 막걸리는 비워가고 밤은 깊어 가는데 우리는 부처와 예수를 안주 삼아 즐거운 담론을 펼쳤다. 우리는 그날 부처였고 예수였다.








전승선 기자
작성 2020.01.13 10:19 수정 2020.01.1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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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