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중원(中原) 문화의 향기를 찾아서 1부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새로운 눈은 여행만 하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시야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울타리 밖에 있는 새로운 풍경과 새로운 문화,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여 배우고 익혀서 이를 실천해야 한다.

 

새로운 시야를 얻기 위해 충절의 고장이자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충주 중원 문화권으로 떠난다.

 

몽고항쟁과 병자호란 때 결사항전을 펼친 곳.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8천여 병사와 함께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운 곳.

음악가 우륵, 대문장가 강수, 명필 김생 등을 배출하며 문화예술을 꽃피운 곳.

땅이 기름지고 교통의 중심지라 삼국시대 때부터 세 나라가 서로 차지하려고 세력을 다투던 곳.

 

충주는 예부터 한반도 중심에 자리하여 중원이라 불리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요지로 삼국 모두 이 지역을 전진기지로 중시해왔다. 삼국 중 중원(충주)을 차지하는 나라가 전성기를 맞이할 만큼 충주는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렇듯 충주는 삼국의 팽창과 대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역이다.

 

수주팔봉은 문주리 팔봉마을 앞을 흐르는 달천(달래강) 위에 건너 편 산의 정상에서 강기슭까지 여덟 개의 봉우리가 떠오른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이 지천인 이 땅에 이만한 봉우리야 어디서든 볼 수 없겠냐만 산자락을 휘감아 도는 강줄기와 폭포, 모래톱이 어우러진 풍광이 마치 병풍 속 그림 같다.

출렁다리에서 전망대까지는 직선거리가 300m 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지만 절벽에 창검처럼 서있는 날카롭고 가파른 바윗길의 위세가 당당하여 오르기가 생각보다 만만찮다. 전망대에 오르면 팔봉마을 전경과 문주리, 토계리, 향산리로 흘러가는 달천의 유장한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달천은 속리산 천황봉에서 발원해 솔향기를 품고 화양계곡의 암반을 지나면서 맑디맑게 정제되어 폭 20m, 길이 96km로 흐르는데, 오대산 우통수, 속리산 삼파수와 함께 '조선의 3대 좋은 물'로 알려져 왔다. 이처럼 풍경이 수려하고 아름다운 물줄기가 흐르는 팔봉마을 달천 강가는 캠핑 매니아들에게 최고의 야영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수주팔봉 출렁다리. 칼바위 위로 구름다리가 놓여 전망대와 두룽산을 오를 수 있다.

 

전망대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달천이 빚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볼 수 있다.

 



지리상으로 한반도 중앙에 있는 고을, 충청북도 충주. 이 고을은 한반도 중심이라 하여 중원(中原)’이라 불리었다. ‘중원이라는 지명과 함께 한반도 중심임을 알려주는 상징적 문화유산이 바로 국보 제6충주 탑평리 칠층석탑(忠州 塔坪里 七層石塔)인데, 보통 중앙탑으로 불린다. 이 탑은 남한강 상류 강가의 높은 토단 위에 건립된 통일신라시대의 7층탑으로 높이가 무려 14.5m이다.


신라 원성왕이 국토의 중앙이 어딘지를 알아보기 위해 보폭과 걸음 속도가 같은 사람 둘을 남과 북의 끝 지점에서 동시에 출발시켜 그 둘이 만난 자리에다 이 탑을 세우는데, 국토의 정중앙에 탑을 세웠다는 뜻이다.



 

경주의 다보탑과 닮은 모양새로 이중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렸고, 그 위에 상륜부를 구성한 석탑이다.

 

탑의 훼손을 막고자 주변을 사직공원으로 조성한 덕분에 푸른 잔디와 호수가 잘 어우러진 역사문화공원이 되었다.

 



국보 205호 충주 고구려비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높이 203cm, 55cm, 두께 33cm에 새겨진 많은 글자들이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지만 전부대사자’, ‘제위등 관직 이름과 중국 지린성 지안의 광개토대왕비에 나온 고모루성등 같은 글자가 새겨져있어 고구려비로 인증되었으며, 남아있는 글자를 통해 고구려의 남진과 당시 신라와의 관계를 알 수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지금까지는 장수왕 때 세운 비로 알려져 왔으나 마모되어 그동안 잘 보이지 않았던 맨 첫머리 제액을 3D 스캐닝 데이터와 RTI 촬영으로 판독한 결과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 글씨를 해독함에 따라 장수왕이 아닌 광개토대왕 때 세운 비로 새롭게 추정되고 있다.

 

작년 이 지역의 숙원사업이던 국립충주박물관 건립 계획이 확정됨에 따라 박물관은 2026년까지 충주 고구려비가 있는 중앙탑면 입석마을 부근에 세워질 예정이다.

 

새로 건립되는 충주국립박물관의 대표 유물로 결정된 충주 고구려비

 

비석 3면에 새겨진 230자 중 206자는 판독이 가능하다고 한다.

 


충주 대문산에 자리한 탄금대(彈琴臺)는 산세가 평탄하고 송림이 우거진 공원으로 꾸며져 조용히 산책하기 좋다. 특히 탄금정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강에 솟은 바위절벽 꼭대기인 열두대가 나오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아래로 발을 디딜 때마다 바뀌는 풍경은 감탄을 자아낸다.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신라로 귀화한 악성 우륵을 진흥왕이 충주에 살게 했는데,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했다고 해서 탄금대라 불린다.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푸른 하늘을 만끽하며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이곳에서 임진왜란 때 삼도순변사 신립장군은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들과 싸우다가 8천병사와 함께 장렬히 전사하고 만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가 탄금대에서 순절한 신립 장군과 8,000명의 병사를 기리는 팔천고혼 위령탑

 

 

탄금대 열두대로 내려서니 우륵의 가야금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조령을 버리고 왜 탄금대를 택했을까. 두고두고 비난받는 패장 신세로 전락한 신립장군은 당시 한양을 향해 여러 방향에서 북진하는 왜군들과 효율적으로 싸우기 위해서 차라리 조령, 죽령, 추풍령을 다 포기하고 한양 인근에서 결전을 벌이자고 제안하지만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결과가 바로 탄금대 전투다.



 

남쪽에서 흘러온 달천과 서쪽에서 온 남한강이 열두대 앞에서 몸을 섞는다.



탄금대 절벽에는 물새들이 겨울 찬바람을 가르며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겨울 나그네는 무심히 흐르는 달천과 남한강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젖는다.

기막힌 절경의 탄금대에 감탄하고, 슬픈 역사를 지닌 탄금대에 한탄한다.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1.16 11:30 수정 2020.01.16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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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