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윤정 칼럼] 예멘에서의 미소

 

“FAKE REFUGES GO HOME RIGHT NOW” “국민이 먼저다” 20187, 푯말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에 대한 한국 뉴스를 보게 되었다. 제주도에 500여 명의 예멘 난민이 도착한 이후 한국에선 외국인 혐오증 몸살을 앓고 있는 듯하다. 한국의 예멘 난민 기사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예멘에서의 기억들을 불러왔다. 아름다운 조개껍질 조각을 몰고 오는 밀물처럼 흩어졌던 아름다운 기억의 조각들이 밀려왔다.

 

세계은행에서 일하면서 20111월에 예멘의 수도 사나 Sana'a로 출장을 갔었다. 이슬람 국가로의 첫 여행인 데다가 당시 국경 지역에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이 활약하고 있어 주변에서 염려가 많았다. 단일민족을 민족의 긍지로 여기던 한국에서 나고 자라 모든 교육과정을 마친 나는 이슬람 문화나 국가들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도 별로 없었다. 카타르 항공 비행기에 몸을 싣고 DC에서 카타르 도하 Doha까지 날아간 후, 도하에서 예멘 항공을 타고 사나까지 갔다.


팀원들은 항공사 안전성을 따져 모두 다른 경로를 선택했는데, 나는 가장 단시간인 경로를 택해 도하에서 예멘까지 예멘 항공을 택했다. 아이들을 두고 출장을 다닌 관계로 항공편을 예약할 때 여행 시간을 최소화하려 애썼다. 출장은 주말에 출발해 출장지에 도착하자마자 일을 시작해 일을 마치고 주말에 돌아오는 터라 적어도 두 주 주말을 잃게 되어 가족과의 소중한 시간을 희생해야 하는 데다 당시 두 딸아이는 12, 8살로 점점 엄마의 존재가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도하에서 사나까지 예멘 항공을 타고 두 시간 반 정도 비행하는 동안 나는 예멘과 한국의 유사점을 주목하게 되었다.

 

예멘 항공은 비행기는 낡고 오래됐지만, 식사는 마치 가정집에서 손님을 대접하듯 금테를 두른 사기그릇에 정성스럽게 담아주었다. 손님 대접을 귀히 여겨 누추한 집에 살아도 손님은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하는 한국인처럼. 예멘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보니, 한국이 서해, 동해, 남해로 둘러싸인 것처럼, 예멘도 홍해, 아덴만, 아라비아해에 맞닿아 있었다. ‘여러 나라의 길목에 위치해 있어 그들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처럼 고달팠을까?’ 그들의 역사를 알지 못하던 나는 막연히 그들의 역사도 수많은 침략으로 시달린 우리와 비슷할까 생각했다.

 

이슬람 국가의 주말은 금요일과 토요일이어서, 우리의 업무는 일요일에 시작하여 목요일에 마치는 일정이었다. 일을 마치기 전날, 예멘 중앙은행 팀원들은 우리를 사나의 옛 도시로 데리고 가 구경시켜 주었다. 사나의 옛 도시는 1986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적지로 지정된 곳으로 예멘사람들은 그들의 오랜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예멘 직원들 중 몇몇은 그들의 전통의상 토브 thobe을 입고 머리엔 터번을 쓰고 나왔는데 특히 잠비야Jambiya”라고 불리는, 허리에 커다란 벨트 가운데 차고 있는 화려한 단검이 인상적이었다. 그들 중 예멘 팀 리더인 자미르는 어렸을 적 보았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연상시키는 하얀 토브를 입었는데 그의 단검집은 은으로 매우 섬세하게 세공되어 특히 인상적이었다.

 

사나 옛 도시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전설로는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 샘이 세웠다고 한다. 샘은 유대교와 이슬람교 모두의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의 선조로 기원전 2448년에서 1848년까지 6백 년을 살았다고 하니 사천 년도 더 된 유적지인 것이다. 역사적 유적지를 기대하고 다가간 사나의 옛 도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움을 품고 있었다. 10 미터도 넘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정교한 성벽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고 예멘의 문이라는 뜻의 --야만 Bab al-Yaman”이라 불리는 웅장한 성문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성문 안에는 높이와 모양이 다른 타워빌딩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었는데 원형, 직각, 정사각 등의 다양한 모양과 흙과 돌, 구운 벽돌 등의 다른 소재와 색이 어우러져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북적이는 성문을 들어서자 뛰어다니는 남자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 중 키가 큰 한 아이가 달려와 내게 물었다. “관광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으세요?” 예멘 동료들이 그들을 물리쳤지만, 그 소년은 꽤 집요하게 쫓아오며 말했다. “사원과 멋진 빌딩들을 보여드릴게요. 모두다 천 년이 훨씬 넘은 건물들이요.” 내가 예멘 동료들에게 그런 소년들은 누구냐고 묻자 자미르가 답했다. “이 성안에서 사는 아이들이지요. 학교도 이 안에서 다니고. 이 성 안의 도시는 역사적인 문화 유적지이지만 수천 채의 집에 가족들이 살고 학교, 모스크, 가게 등등의 여느 도시와 다를 것없이 바쁜 곳이랍니다.”

 

정말이지 성문을 들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원 자미 알카비르Jami Alkabir”을 마주쳤다. 이 성전은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 선지자의 명으로, 이슬람 사원 중 처음 지어진 것 중 하나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없는 관계로 밖에서 보고 지나쳐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마다 전구 불빛이 반짝이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길로 들어섰다. “수크Suq”라 불리는 시장은 성 안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는데 좁은 돌길 양쪽에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 장신구, 기념품 등을 파는 골목, 식재료 및 음식을 파는 골목, 대장장이가 쇳덩이를 두드리는 코너 등등. 자미르의 설득에 못 이겨 나는 장신구를 파는 가게에 들어갔다가 예멘산 마노 목걸이와 귀걸이를 사고 기념품 가게에서 장식용 상자에 들어있는 예멘의 단검 잠비야도 하나 샀다.

 

하지만, 절벽 위에 유려하게 서 있는 유적지보다 더 인상 깊게 남은 기억은 그곳 사람들이다. 처음엔 예멘 사람들은 웃지도 않고 무표정한 듯 보였지만 곧 그들이 다정다감하고 손님 대접을 극진히 하는 친절함을 지녀 한국인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중앙은행 직원 중 테크라'라는 이름의 여인이 있었다. 전통의상 아바야를 입고 히잡을 쓰고 있어 눈만 드러내고 얼굴과 온몸을 가린 채 꼭 필요한 말만 다소곳이 말하던 그녀는 업무를 마치는 마지막 날 내개 다가와 말했다. “팀원 중 유일한 여자인 당신에게 오늘 저녁 시간이 된다면 꼭 사나를 구경시켜 주고 싶습니다.”

 

나와 함께 온 남자 직원들은 그날 업무를 마친 후 예멘 팀 리더인 자미르 집에 가 캇Khat을 씹으며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있었다. 캇은 일종의 환각을 주는 식물로 이를 껌 씹듯 씹는 것이 그곳의 전통이라 했다. 거리 곳곳에서 비닐 가득 캇을 담아 셔츠에 매달고 다니는 예멘 남자들을 보았다. “한 주의 일을 마치고 모여서 캇을 씹으며 담소를 나누는 건 미국에서 금요일 저녁에 맥주를 마시며 해피아워를 즐기는 것과 같다고 예멘 동료들은 말했다. 나는 테크라가 남자 동료들의 계획을 알고 내게 그런 제안을 한 것인지, 차마 그녀에게 왜 내게 그런 제안을 하느냐고 묻지는 못해 그 연유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흔쾌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일과를 마치고 그녀는 남편과 어린 두 딸,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내가 머무는 호텔로 나를 데리러 왔다.

 

그녀 남편은 차를 몰아 이슬람 사원과 공원을 보여준 후 서울의 남산처럼 지대가 높은 도로를 지나다 전망대 같은 곳에 차를 멈췄다. 차 밖에 나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나 도시의 불빛이 밤하늘의 별빛처럼 총총히 반짝이고 있었다. 테크라의 두 딸은 차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두 살이 좀 넘은 둘째는 이모인 테크라의 여동생 무릎 위에 앉고 네살 반이 된 큰아이는 이모와 나 사이에 앉았다)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크지않은 웃음소리로 차 안을 채우곤 했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수줍은 미소를 짓곤 했는데, 아이들의 미소와 웃음소리는 고요한 차 안에 흐르는 음악처럼 행복의 기운을 전하곤 했다. (테크라 외에는 아무도 영어를 하지 못하는 데다, 테크라도 조용한 성격에 업무에 필요한 영어를 하는 정도여서 도시를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경우에만 말을 할 뿐이어서 차 안에는 대체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상점이 늘어선 쇼핑 거리에도 가서 한 상점에서 나는 내 딸들에게 줄 곰 모양의 크리스털 장식품을 산 후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식당에 들어서니 테이블은 보이지 않고 2미터 가량 되는 칸막이들이 곳곳에 서 있고 몇몇 칸막이 앞에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식당 종업원에게 인도되어 한 칸막이 뒤에 들어서서야, 칸막이 뒤에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안에서 히잡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테크라와 그녀의 두 딸과 여동생과 식사를 하는 동안 그녀의 남편은 칸막이 밖에 머물러 당신 남편은 우리와 식사를 함께 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는 밖에서 따로 먹는다.”고 답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옛 전통을 지닌 한국에서 자란 나이지만 그렇게 따로 나누어져 칸막이에 갇혀 식사하는 것은 무척이나 생경했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선 남자와 여자 학교가 따로 있었고, 가부장적인 사회였던지라 근대화로 핵가족화되기 전 여러 세대가 함께 살던 시절엔 남자와 사내아이들은 여자들이 준비한 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여자와 계집아이들은 부엌에서 따로 식사를 했다고 듣곤 했었다. 나는 테크라에게 집에서도 남녀가 따로 식사하느냐고 물었다. “가족에게 얼굴을 들어내는 것은 허용되니 집에서는 함께 식사를 한다.”고 답했다.

 

출장을 다녀온 후에도 그녀는 내게 간혹 이메일로 멋있는 사진이나 우스운 이야기를 보내곤 했다. 그녀가 보낸 글 중 아직도 종종 생각하곤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한 하버드 MBA 졸업생이 멕시코 해안가 도시에 가서 멕시코 사람들을 설득했다. 멋있는 리조트를 짓기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그들이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묻자 그는 그래야 그들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왜 부자가 되야하느냐고 다시 물었고 그는 그러면 은퇴를 해서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은 은퇴를 해서 즐기는 인생은 어떤거냐고 물었다. 그는 여유롭게 낮잠도 자고 낚시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즐기는 것이라 했다. 그러자 그들은 답했다. “왜 은퇴를 기다리냐? 우린 벌써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 이듬해인 2012, 독재정권과 가난에 시달린 사람들의 데모로 튜니지아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이 아랍 세계로 번져나가 예멘의 정권은 무너졌다. 어느날 그녀는 내게 이메일을 보내 페이스북이 금지되었고 곧 인터넷도 끊길 거라는 소문이 있다고 했다. 그 이후로는 그녀와 연락이 끊어졌다. 30년을 넘게 집권했던 살레Saleh는 이란이 종주국인 시아파인데 그 정권이 무너진 후, 사우디를 따르는 수니파인 하디Abdrabbuh Mansour Hadi가 권력을 차지했고 예멘은 중동의 두 종주국의 권력 싸움으로 전쟁터로 변해갔다.

 

중동의 두 강국, 수니파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인 이란의 대리전이 점점 격화되어 나라는 둘로 나뉘어 내전 상태로 치달았다. 2015년 초, 북쪽 국경지역에 머물던 소수파 시아그룹인 후디Houthi 반군이 사우디와 미국의 세력을 가진 새 권력자인 하디가 차지한 수도 사나를 점령하자 예멘 전쟁은 시작되었다. 세계뉴스를 통해 그곳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긴 했지만, 날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소식의 하나로 묻히곤 했다. 2015612, 나는 으레 저녁식사를 하며 보던 월드뉴스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폭격으로 사나의 세계유적지인 옛 도시의 일부가 무너진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 후로 피와 잿더미로 범벅이 된 어린아이들, 영양실조로 기형적인 모습이 된 아이들 등등의 더욱더 처참한 뉴스들이 전해졌고 수많은 이들이 생명과 삶의 터전을 잃어갔다. 예멘 인구의 4분의 322백만이 넘는 사람이 삶의 위협을 받고있는 상황이고 매 십 분마다 5세 미만의 아동이 전쟁으로 인한 피해로 죽어가고 있다고 보고한 유엔 보고를 읽으며, 나는 그들의 멈추지 않는 전쟁이 한국인이 겪은 한국전쟁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국도 45년간의 일제강점기 후 세계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외력에 의해 분단된 후 몇 년간 38선 근방에서 악화되던 상황이 결국 19506월 한국전쟁으로 치달았다. 전쟁으로 한국인의 열 명 중 하나는 죽게 되었고 온 나라가 초토화되었으며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전쟁고아들이 전 세계로 입양되어 갔다.

 

왜 근처에 많은 나라를 두고 이 먼 한국까지 와야했는가?” 한국인 시위대들은 물었다. 망명 신청을 한 예멘인들을 가짜 난민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들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나는 내 조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난민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5년에 한국정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인의 세명 중 한 명은 외국인이 자신의 이웃이길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의 14%, 중국의 12%에 비하면 훨씬 높은 수치이다. 나는 잠시 한국인의 외국인 혐오증은 왜일까 생각해보았다. 과거에 외국인에게 고통받은 역사가 한국인이 외국인을 싫어하도록 유전자를 만든 것인가?

 

예멘에서 그들이 내가 한국인이라 했을 때 자신들이 한국 드라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한국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었다. 그들은 한국의 드라마를 통해 한국을 동경했고, 한국의 아픈 역사와 현재 대통령도 한국전 당시 난민 가족이었음을 알고, 소망을 품고 그 먼 길을 왔으리라. 이웃 나라의 대리 전장이 된 자신의 나라를 떠나 이웃 나라로 갈 수도 없고, 가난한 나라로부터 오는 이민자에 적대적이 된 미국 및 유럽에도 향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의 제주도가 관광 육성을 위해 무비자로 방문객을 받아들이는 것을 알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머나먼 나라 한국까지 왔을지도 모르겠다.

 

네 집으로 돌아가라는 슬로건은 내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미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온 나이기에. 외국, 낯선 땅에서 산다는 건 참으로 힘겨운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스팅은 뉴욕에 사는 영국인 Englishman in New York”에서 노래했다. “당신은 내가 말할 때 내 악센트를 듣지요.” 하물며 외양도, 문화와 언어도 전혀 다른 나라에서 정착해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고군분투를 감당해내야 한다. 미국에 와서 나 역시 내 나라에선 경험하지 않았던 모욕의 순간을 겪곤 했다. 외국인으로 받은 나의 상처는 예멘인들이 한국에서 겪고 있는 것에 비할 수 없지만, 상처는 상처로 남는다.

 

제주를 둘러싼 바다의 파도 소리가 자신의 나라와 아덴만의 물결을 그리워하는 예멘인들에게 작은 위로를 줄 수 있을까? 제주도 위에 뜬 밤하늘의 총총한 별들을 보며 사나의 밤하늘을 생각하며 꺼져가는 소망에 불을 지필 수 있을까? 테크라와 함께 왔던 두 딸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송윤정]

세계은행(워싱턴 D.C.) 금융전문가

2015년 워싱턴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삼정회계법인 / 삼일회계법인

서울대학교경영대학원 국제금융 석사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1.17 11:04 수정 2020.01.17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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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