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중원(中原) 문화의 향기를 찾아서 2부



절집은 없어졌지만, 국보는 남았네.

 

충주를 대표하는 고려 국보사찰 청룡사지(靑龍寺址)를 아침 일찍부터 찾는다. 청계산 자락 남쪽 기슭의 청룡사지 주차장에서 참나무가 우거진 야트막한 오솔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 이끼를 잔뜩 머금은 채 국보를 포함한 주요 문화재들이 길가에 널려있다. 융성했던 대가람은 조선후기 화재로 절집은 사라지고 국보인 보각국사의 묘탑, 보각국사탑과 사자석등, 석종형 승탑과 부도, 위전비 등의 문화재만 남아 인적 끊긴 절터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부처는 천년의 바람이 지워버린 폐허 위에도 있다. 마음이 청산이라면 거기가 법당이고 무문관이다.


이곳이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길지임을 안 어떤 도승이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암자를 짓고 청룡사라 했다고 전해진다.




청룡사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활동한 보각국사 혼수와 인연이 깊은 절이다. 혼수는 계율에 엄했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금강산과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하다가 국사(國師)로도 활동했으나 왕의 부름에 쉽게 응하지 않고 속세의 명리에 초연한 참된 구도자의 길을 걸었으며,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등 당대의 유학자들과도 교유했다. 조선 태조 원년에 청룡사로 돌아와 73세에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내려 보각국사라 하고, 탑 이름을 정혜원융이라 하였으며, 청룡사에 대사찰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청룡사지 석종형(石鐘形)승탑. 높이가 1.98m로 비교적 큰 편인 부도다.

 

보각국사탑(국보 제197호)과 사자석등(보물 제658호). 보각국사의 묘탑은 잘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1단의 축대를 쌓고 그 중앙에 팔각원당형의 부도를 건립하였다.

 


 

탑과 석등은 밤에 볼 일이다. 동네사람들은 석등에 불 밝히고 강아지 내세워서 한마당 탑돌이를 한다. 콧노래 부르며 탑을 돌면 법당의 근엄한 부처님도 흥에 겨워 슬며시 내려와 사람들 틈에 끼어 탑돌이 한다.

 

절터 아래에 있는 지금의 청룡사는 본디 암자가 있던 곳에 새로 대웅전과 요사채를 지은 조그만 건물들이어서 옛적 큰절의 자취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발길을 돌린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 정호승 풍경 달다’ -

 

가금면 봉황리 내동마을 북쪽 가파른 산기슭의 바위에는 보물로 지정된 마애불상군이 있다. 사람 발길이 드문 외로운 곳에 자리한 가난하고 시린 불상을 찾아갈 때는 그리운 옛 애인 만나듯 언제나 가슴 설렌다. 마을 앞 다리에서 하천 옆으로 난 좁은 둑방을 따라 들어가면 들판에 휑하니 만들어진 주차장이 나온다.

 

불상들은 상당히 가파른 비탈 위 바위에 새겨져 있어 급경사의 철제계단을 따라 올라가야한다.

 

 

이곳 불상군은 우리나라 석불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인 6세기 중엽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 역사적 가치가 크다. 또한 근처의 남한강을 통해 고구려로부터 불교가 이곳으로 전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이곳의 불상군은 두 군데에 나뉘어 있는데 가파른 철제 계단을 올라가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절벽에 부조된 본존상과 공양자상, 반가사유상과 보살상 등 모두 여덟 분으로 이루어진 불상군이다. 대략 1m 안팎인 8분의 불상은 모두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찬바람에 말없이 눈을 감고 고요히 서 있거나 앉아 있다. 불상들이 있는 암벽 위쪽에는 다른 암반이 튀어나와 있어서 천연의 지붕 구실을 한다.

 


 

좌로부터 본존상, 공양자상, 반가사유상, 5분의 협시보살이 순서대로 새겨져 있다.



이곳을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제법 널찍한 공간에 결가부좌한 높이 1.7m, 2m의 여래상 마애불이 있다. 마모될 대로 마모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영원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버린 듯 고요히 앉아 있는 마애불의 모습에 순간 울컥하고 만다. 여래상의 머리 둘레에는 화불이 다섯 구 새겨져 있는데 모두 무릎을 조금씩 들고 연화좌에 앉은 모습이 귀엽고 친근하다. 큰 절의 대불이 당대의 권력자를 위한 석불이라면 봉황리의 소소한 석불들은 민초들을 위한 석불이다.


여래상 앞은 제법 터가 넓고, 허술하나마 공양단을 쌓았던 흔적도 있다.

 


산을 내려오면서 오래 전 이곳 산기슭에 어찌하여 불상들을 모신 것인가라고 자문해보고, ‘남한강 강물에 담겨 유유히 흘러간 먼 세월의 사연들을 어찌 알 수 있으리라고 자답한다.

 

충주 장천리에서 장미산 봉학사 가는 산길은 적막하고 고즈넉하다. 봉학사 주차장에서 산성을 따라 느릿느릿 걷으면 암자의 솔향기가 유난히 코끝을 스친다.


장미산성(薔薇山城)은 높이 340m 가량의 장미산 정상과 북동쪽 계곡 윗부분을 돌로 에워싼 산성으로, 충주 시내를 감싸고 흐르는 남한강변의 요충지에 축조되어 남한강이 천연 해자역할을 한다. 남한강이 남쪽에서 동쪽으로 굽었다가 서쪽으로 흐르는 만곡부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서 사방을 전망하기에 유리하고, 남한강을 따라 남북으로 오가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군사전략 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성벽의 일부가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고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성 안에서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산성을 점령하고 경영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산정에 서면 겨울 햇살에 봉학사는 노승처럼 졸고 있지만, 산성의 하얀 돌무더기는 나그네 손발을 더욱 시리게 한다.


성의 크기는 둘레 약 2.9㎞, 너비 약 5∼10m 정도이다.
힘들게 오른 만큼 장미산성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남한강 전경이 일품이다.

 

 

목계나루는 조선시대 충청도에서 생산되는 산물을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올려 보내는 큰 나루터였다. 1960년대 말까지 찻배가 있었을 만큼 단양, 제천, 원주에서 장호원, 이천, 서울로 연결되는 중요한 길목이었으나, 1970년에 들어와서 대홍수와 목계교의 건설로 나루 기능을 상실하는 바람에 지금의 작은 마을로 쇠락하고 만다.



목계나루가 있던 곳은 목계교가 자리하고 있다.
목계나루 장터는 한양 가는 뱃사공들과 짐꾼, 견마잡이 등으로 북적거리고 주막집과 색주가를 제집처럼 드나들던 보부상들이 강가 나루에 실루엣 되어 아른거린다.



이틀간 중원의 자연, 역사와 문화를 넘나들다가 마지막에 도착한 목계나루에는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비만 허허로이 서있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나루로 내려서니 허공을 가르는 차가운 바람이 귓가를 때리고, 강가에는 잔돌만 가득하다.

 

중원의 아동 문학가이자 독립 유공자 동천 권태응 선생이 노래한 자주색, 흰색의 감자꽃피는 계절에 이곳을 다시 찾으리라.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1.20 10:38 수정 2020.01.20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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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