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종이학 여인

강혜림

 


    

누구나 그렇듯 지나간 사랑은 무척 동화적이다.

 

열일곱, 고등학교나이에 쓴 일기장을 넘겨볼 때마다 수줍은 사랑에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빨간 가방을 들고 검정교복에 단발머리였던 뒷집, 여학생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며 마음 설렜던 것은 얼마동안 지속되었다. 이런 마음이 사춘기에 내가 처음으로 가졌던 짝사랑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소설처럼, 한편의 영화처럼 내가 가졌던 짝사랑의 세월은 과거 속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까까머리의 고등학생 때 가슴에 품었던 짝사랑의 기억은 나에게는 아직도 소중하다.


그런 청순(淸純)함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 고결하고 아름다운 여인상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발꿈치를 들고 담장너머로 그 청순한 여학생을 훔쳐보았던 나의 순수한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고등학생인 사춘기시절, 그때부터 생기기 시작한 청순한 여인상(女人像)은 성인이 될 무렵엔 신비한 여인상으로 바뀌어 그런 여인을 꼭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청순한 것은 하늘빛처럼 마음이 푸른 것이다. 밤에도 구름사이로 달빛이 보이 듯 청순한 것은 또 다른 신비함을 부른다. 너세니얼 호손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주인공 어니스트는 평생 산위에 있는, 얼굴처럼 생긴 바위를 보며 살았다. 그는 언젠가는 큰 바위 얼굴처럼 자상하면서도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 나타나리라는 전설을 굳게 믿었다.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사람들이 숱하게 나타났지만, 진짜로 산()의 기품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늙어버린 주인공자신이었다. 오랜 세월, 큰 바위얼굴을 마음에 품고 살다보니 어느덧 자기 모습이 그렇게 변해버린 것이다정신적인 사랑, 즉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도 그렇다.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전부를 건다. 손가락을 불속에 집어넣은 고흐의 이야기는, 사랑의 열병에 시달리는 이에게는 결코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이렇듯 사랑은 우리의 삶에 엄청난 에너지를 불어 넣어준다. 아울러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강한 소망을 갖게 만든다.


나의 마음을 설레게 했고 담장 너머로 훔쳐보며 좋아했던 여인, 그 빨간 가방을 들었던 청순한 여학생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럼 어느 날로 되돌아 가보자. 파랗게 봄꽃이 피었고 하늘엔 몇 마리 새들이 날개 짓을 할 때 호수가 있는 숲속은 무척이나 조용하고 맑았다. 호수 한 귀퉁이가 연꽃으로 뒤 덮인 호수의 수면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나는 호수가 옆, 벤치에 앉아 호수풍경 전체를 마음에 담기라도 하듯 호수의 잔잔함에 심취해 있었다. 호수 주변은 내가 좋아하는 청순함의 극치였다. 나무들은 너무 푸르러 신비스러울 정도로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 있었고 바람은 작은 풀숲을 잠재우고 있다. 시내에서 차로 약 사십분 정도 달리다보면 담양군을 들어가기 전 경계선에 북구 청옥 동이란 마을에 대단위 호수공원이 조성되었다. 이곳을 찾는 이유를 말한다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맑은 사색(思索)을 가슴에 담아갈 여고 한다면 시적(詩的)인 표현이 될 여는지 모르겠다.


그때였다. 종이로 접은 학을 공중에 날리는 여인을 보았다. 그 종이학은 여인의 머리위에서 방향 없이 몇 미터를 날아가다 이내 떨어지고 만다. 여인은 떨어진 종이학을 다시 줍더니 자기의 소망을 날리 듯 다시 하늘을 향해 날린다. 떨어지면 또 날린다. 나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 여인을 보았다. 떨어진 종이학이 내 발등에 떨어졌다. 여인은 주춤하더니만 내 앞에 떨어진 종이학을 주우려고 한다.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종이학이 멀리 날아가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떨어진 종이학을 주워 여인에게 건 내며 이렇게 말했다. 여인은 나의 말에 답변 대신 얇은 미소로 화답을 한다.


종이학에 눈을 안 그렸으니 앞이 안 보일 것 아닙니까? 그래서 멀리 날아가지 않는 겁니다.”


여인은 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미있다는 듯 말을 받는다.


선생님! 참 재미있는 분이군요. 뭐하시는 분이세요?”


한참 후에 안일이지만 여인은 장애인학교 교사였다. 사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은 티 없이 맑은 눈으로 말하는 모습은 잔잔한 호수 같았다. 호수공원 근처에 학교가 있는데 가끔씩 학생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유치원 아이들이나 하는 종이로 접은 학을 무슨 재미로 저렇게 허공을 향해 날리고 있는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저는 마음이 우울하고 답답할 때는 종이를 접어 학을 만듭니다. 그 종이학에다 우리 아이들의 소망을 적어서 하늘을 향해 날려 보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여인은 말을 마치자 성모(聖母)상의 모습으로 두 손을 모은다. 온화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목성은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차분하면서도 정이 흘러 넘쳤다. 장애인 애들을 가르치는 일은 자기의 천직이라며 웃어 보이는 종이학의 여인은 진정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사의 심성을 가진 여인이 아닐까? 천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본인의 바람보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소망을 기도하며 종이학을 날려 보내는 저 여인의 청순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온화하면서도 정이 넘치는 목성, 그리고 천사 같은 사랑과 청순한 심성, 티 없이 맑은 눈동자, 먼 옛날, 설레는 마음으로 훔쳐보며 밤잠을 설쳤던 그 청순한 여학생이 큰 바위 얼굴처럼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게 착각이었다 하더라도 종이학 여인은 분명 오래 전, 내가 사랑했던 여학생이었고 그렇게 신비함의 모습을 기다렸던 큰 바위 얼굴이었다. 모둠발로 가슴 설레며 훔쳐보았던 사춘기시절의 청순한 여인상은 이제 내 앞에 또 다른 신비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플라톤은 사랑은 영원을 향해가는 사다리라고 말했다. 괴테는 나이 칠십에도 10대 소녀를 사모했고, 장년의 피카소는 스물세 살 여대생에게 장미를 바치며 열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했다. 그들이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데는 사랑도 큰 힘을 발휘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애타는 마음이 불타오르고 있다면 분명 내가 찾은 호수에서 종이학 여인을 보게 될 것이다.


어느 조그만 가을날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청순하고 신비한 그녀 같은 종이학 여인을 내 옆에 앉히고 싶다. 두 눈에서 그리운 눈물이 한 없이 흐르고 내 죽어도 잊지 못할 여인이라면 차라리 신비한 사랑을 가슴에 묻고 나는 움직이지 않는 망부석이 될 것이다. 때로는 종이학 여인은 나에게 혼자라는 외로움을 준다. 왜 그럴까? 밤 속에 둘이 있다면 종이학 여인은 사랑한다고 울고 있을 것이고 나는 그 눈물에 쓰러져 죽고 싶을 뿐이다.

조그만 가을날, 호수가 있는 벤치에도 가을밤은 찾아 왔다. 나의 그림자가 외로움에 눈물 흘리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도 동행자는 있었다. 동행자는 다름 아닌 종이학 여인이었다.


그것은 바로 동화 같은 사랑이었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1.22 10:52 수정 2020.01.2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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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