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희망가

희망가

 

 

희망가(希望歌)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은 이 노래는 우리 민족역사의 곡절(曲折)을 닮았다. 탕자자탄가(蕩子自嘆歌), 탕자경계가(蕩子警戒歌), 일요일가(日曜日歌), 금주창가(禁酒唱歌)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무엇을 자탄하고, 경계하자는 것이었나. 일제는 왜, 1933년 음반취재규칙으로 대중가요에 목 조르기를 하면서 이 곡을 금지의 모두목록(冒頭目錄)에 두었을까.  

 

작사자는 불분명하고, 곡은 19세기 미국인 제러마니어 잉갈스가 작곡한 찬송가 우리가 집에 돌아왔을 때’(When we arrive at home)의 멜로디, 김해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임학찬(1890~1952)이 곡을 붙인 노래란다. 편곡으로 보아도 무방할듯하다. 노래가 불리어진 시기는 1920년대 초반부터.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 같도다 //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 담소화락에 덤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랴 /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  https://youtu.be/QNTBfdAUtxk


 

풍진세상(風塵世上), 부귀영화(富貴榮華), 춘몽(春夢), 담소화락(談笑和樂)이 노랫말 화두다. 풍진세상과 춘몽이 대비를 이루고, 부귀영화와 담소화락이 생각의 연줄을 이어준다. 대중가요가사는 그 시대 이념이다. 1919121일 고종황제께서 급서(急逝)하시고, 40일 만에 국장(國葬)을 거행한다. 장례일 2일 전 날이 3.1독립운동 민족거사 날이었다. 이 거대한 민족의 항거(1919.3.1.)를 기점으로 일제는 조선총독부에 대한 식민통치의 근간전략을 전환한다. 무단통치(武斷統治)에서 문화통치(文化統治). 허리에 긴 칼자루를 차고서만은 우리민족의 결기를 꺾을 수 없음을 통찰한 것이다.  

 

그래서 언론·집회·문화·문학 등 활동에 물꼬가 조금은 터였다고 해도 된다. ‘반달·오빠생각·봉선화등이 이 시기에 불려졌다.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도입(소파 방정환 1899~1931, 손병희 사위)한 시기도 이 즈음이다. 노래의 이름은 희망가인데, 사실은 나라 상실 시기의 민족 절망가(絶望歌)라고 음유함도 가치가 있으리라. 이 노래는 1921년 민요가수 이채선(한성권번 기생)과 박류파가 그 시절과 어울리는이 풍진 세상을이란 제목으로 부른 뒤에 대중들이 통성(通聲)하게 되며, 1930년대 채규엽(1911~?)이 음반으로 발표를 했었다.  

 

이승만대통령 애창곡, 이 노래는 우리 대중가요사의 선구자다. 1925년 도월색(경기명창)시들은 방초’, 김산월(1898~?, 조선권번 기생)장한몽’, 1926년에 윤심덕(1897~1926)사의 찬미등과 같이. 희망가는 이름도 분분(紛紛)하듯이 유래에 대한 서설(絮說)도 많다. 박용구 선생의 일본 노래 새하얀 후지산 기슭, 박찬호 선생 외국곡설, 이상준 선생 청년경계가 설 등.  

 

임학찬은 김해에서 출생하여 16세에 대구계성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서울중앙학교로 옮겨 1910년에 졸업하였고, 김해와 마산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부산·마산·김해 등지에서 만세호창단을 조직하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유차영 선임기자


 

 

정명 기자
작성 2018.08.10 14:54 수정 2018.08.1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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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