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축제

8월 10 -14일 통영 일원에서 개최

한산대첩 재현 등 각종 기념행사

제57회 한산대첩축제가 통영 일원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 (재)한산대첩기념사업회 제공


1592년 8월 14일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연합함대는 일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주력함대와 한산도 앞바다에서 한판 승부를 겨루었다. 결과는 조선수군의 완승이었다. 세계 4대해전 중의 하나가 한산대첩이다. 이를 기념하는 한산대첩축제가 8월 10일부터 14일까지 통영에서 열리고 있다. 


세병관에서 행사를 하고 있는 장면, (재)한산대첩기념사업회 제공



(재)한산대첩기념사업회 제공


묘하게도 광복절 전날 이순신 장군은 한산대첩에서 승리했다. 1592년 8월 14일에 한산대첩이 있었다. 한산대첩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전투였다. 옥포해전을 비롯한 이전까지의 해전은 주로 해안포구에서 이루어졌지만, 한산대첩은 넓은 바다에서 쌍방의 주력함대끼리 정면으로 맞붙은 한판 승부였다.


1592년 8월 13일 왜군은 눈에 가시와도 같은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대규모 작전을 준비했다. 거제도 북단의 영등포를 출발한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전선 73척을 이끌고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견내량으로 진출했다.


1592년 8월 13일 통영 건너편 미륵도에 있는 산양읍 삼덕리의 당포에서 물자를 보충하고 전열을 가다듬은 이순신 함대는 이 고장의 목동이었던 김천손으로부터 견내량에 적선 7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다음날인 8월 14일 아침 이곳 한산도 앞바다로 진출했다. 


한산대첩의 현장, 배가 지나가는 오른쪽 뒤로 보이는 섬이 한산도이다.



그 때 우리 함대는 이미 8월 12일에 남해 노량해역에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군 24척, 이억기의 전라우수영군 25척, 원균의 경상우수영군 7척 등 판옥선 56척에다 거북선 3척을 합친 연합함대를 편성한 상태였으며 한산대첩 하루 전에는 당포로 진출해 있었다. 


당포,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다음 날 연합함대가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견내량에서 방화도 쪽으로 왜적 대선 1척과 중선 1척이 척후선으로 나와 있다가 우리 함대를 정찰하고는 견내량 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때 견내량에는 목동 김천손이 알려준 내용과 거의 일치하는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총 73척의 왜선이 진을 치고 있었다.


견내량 : 견내량은 통영시 용남면과 거제도 사이의 협수로다.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여 해난사고가 잦은 곳이다.



여기서 이날 견내량에 집결한 일본군의 전력을 분석해보자. 우선 함선을 보면 대선인 아다케부네(安宅船)가 36척이다. 아다케부네는 전장이 약 20미터 정도 되는 주력 전투함으로 배의 앞부분인 이물에 대포용 총구가 하나 있고 나머지는 조총용 총구가 나 있다. 조총병 약 30명을 포함해서 전투원이 약 60명 정도 승선하며, 노 하나에 1명씩 노 젓는 수부가 80명 정도 된다. 주력 무기는 조총이며 3교대에 의한 연속사격방식으로 사격을 하며 유효사거리는 50미터 정도였다. 


그리고 그 날 24척이 동원된 중선인 세키부네(關船)는 노젓는 수부가 약 40명이며 조총병 20명을 포함하여 약 30명의 전투요원이 승선하는 배로 대포는 탑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소선 13척은 고바야부네(小早船)로 작은 관선이라 불리며 노 20개에 20명의 수부가 매달리고 조총병 8명을 포함하여 약 10명의 전투원이 승선하는 배다.

한편 조선 연합함대의 전력은 거북선 3척과 판옥선 56척이었다.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이다. 판옥선은 다층 전투함으로 비전투요원과 전투요원을 분리 배치한 배다. 즉 노를 젓는 격군(格軍), 키를 잡는 타공(舵工), 돛의 줄을 조정하는 요수, 배 바닥에 고인 물을 퍼내는 무상(無上) 등 비전투요원은 전투요원인 활을 쏘는 사부(射夫), 포를 쏘는 포수(砲手)와 화포장(火砲匠) 등 전투요원과 분리시켜 배치하여 전투효율을 높였다. 즉 격군 등 비전투요원을 판옥 내에 숨기고 전투원은 상장 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상장 위의 넓은 갑판은 대포를 설치하기에도 좋으며 높은 곳에서 쏘기 때문에 사정거리도 늘릴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거북선 : 거북선은 판옥선에 두껑을 덮고 그 위에 송곳이나 칼을 꽂아 적의 접근을 막은 돌격선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하 수사급 지휘관이 탑승한 판옥선은 배의 밑바닥 길이가 약 20미터에 탑승인원 160명, 노 16자루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타 수군장이 탑승한 판옥선은 전장 16미터 정도에 탑승인원 125명, 노 12-14자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판옥선 : 판옥선이 조선수군의 주력 전투함이다. 



판옥선은 배의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라 제자리 회전이 가능하다. 이 기능을 적극 활용한다면, 좌현의 포를 발포할 때 우현은 장전을 하고, 발포가 끝나면 배를 회전시킬 수 있다. 이 시간에 발포를 마친 좌현은 장전을 하고, 장전이 끝난 우현이 적에게 향하면 다시 발포할 수 있다.

 

판옥선에 비교할 수 있는 왜군 전함 아다케는 선박 건조 기술의 차이로 인하여 대포를 줄로 매달아야 쏠 수 있을 정도로 진동에 쉽게 깨지는 배였다. 배를 건조할 때 사용하는 나무의 재질도 조선수군이 사용한 적송이 일본 수군의 삼나무 보다 견고한 것이었으며, 철제 못을 사용하지 않고 배를 짜 맞추는 기술도  조선수군이 한 수 앞서 있었다.

 

당시 왜군은  칼을 들고 상대방 배 위로 기어올라 접전을 벌이는 단병접전을 주로하고 있었다. 각개 병사는 칼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의 장기는 접근전을 벌여 해적처럼 상대편 배에 기어올라 육박전을 펴는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이었다. 이런 전술은 해적들이 주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16세기 유럽은 물론 전 세계 어디에서나 가장 흔한 전법이었다.

그러나 이순신 함대의 전법은 주로 함포를 사용하여 원거리에서 적을 격파하는 당파전술(撞破戰術)이었다. 때문에 적이 우리 배에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한산해전이 있던 그날, 이순신 장군이 판단하기에 견내량은 지형이 좁아 물살이 세고 암초가 많아 우리의 주력함선인 판옥선(板屋船)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배끼리 부딪히면 적의 등선육박전술에 말려들 우려가 있었다. 또한 아군의 장기인 포격전을 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만약 형세가 불리해지면 적은 뭍으로 도망칠 우려가 있었다. 


우리 판옥선 5-6 척이 적선을 유인한 견내량 입구의 해간도 근처 바다


 

따라서 장군은 왜놈들을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어 일거에 전멸시키기로 작전을 짰다. 한산도는 거제와 통영(당시는 고성땅) 사이에 위치하여 사방으로 헤엄쳐 도망가기가 어렵고 혹시 섬에 패잔병들이 상륙하더라도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먼저 이순신 연합함대의 판옥선 5~6척이 왜적의 척후선을 추격하여 공격하는 척하다가 물러 나오자 왜적들은 일제히 돛을 올리고 한산도 앞바다까지 따라 나왔다. 


동여도(토지주택박물관 제공) 상의 한산도 일대 지형. 동여도는 암란 후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채색 필사본 정밀 지도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변 지형을 다시 한번 잘 살펴보면서 상상의 날개를 펼쳐볼 필요가 있다. 73척의 대 선단이 불과 5~6척의 판옥선은 쉽게 섬멸할 것으로 생각하고 전 속력으로 추격했으리라 판단된다. 그 때 나머지 50여 척의 우리 함선은 어디에 있었을까? 옛 삼천진이 있었던 통영시 산양읍 영운리 속칭 삼칭이 마을 포구 안쪽과 방화도와 화도 섬들 뒤에 숨어 있다가 왜 선단이 접근해 오자 일시에 나타나 학익진으로 포위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승리한 한산대첩의 현장,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이 중학생들에게 그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적의 선봉이 포위망 깊숙이 걸려들자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 함포가 일제히 불을 뿜고 수없는 화살이 적선을 향해 날아갔다. 집중포화로 왜적 선봉 주력선 2~3척이 순식간에 불에 휩싸이고 꼬리를 물고 뒤따르던 적선들은 반격은 하면서도 기세가 꺾여 퇴각하려 하였으나 좌충우돌 혼란만 더욱 가중되어 갔다. 이에 사기 충천한 우리 수군은 앞다투어 맹공격을 가하여 총 59척을 격파 또는 나포하여 왜군의 주력함대를 궤멸시켜버렸던 것이다. 후미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갑옷에 화살을 맞은 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전선 14척을 이끌고 견내량을 빠져나가 괭이바다를 지나 김해로 도망쳤다.


전투 중 바다에 떨어져 익사한 왜적의 숫자는 약 9천 명 정도로 추정되며, 그나마 살아남은 패잔병 약 400여 명은 형세가 궁해지자 헤엄쳐 한산도로 올라갔다. 그 날 한산도 일대에서는 거의 하루 종일 전투가 있었다. 해질 무렵 이순신 장군은 승리를 확인하고 한산만 입구의 작은 바위섬 해갑도에 올라 갑옷과 투구를 벗고 땀을 닦았다고 전해 온다. 날이 저물자 이순신 장군은 궁한 적은 쫓지 않는다는 병법에 따라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견내량 한 쪽 바다에서 밤을 새웠다. 이 것이 저 유명한 한산대첩이다. 



해갑도(解甲島) :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에서 승리하고 이 바위섬에 올라 갑옷을 풀어헤치고 땀을 닦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한산대첩의 역사적 의의는 실로 크다.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이며 세계 4대해전 중 하나로 거론되는 한산대첩은 적의 서진을 막아 곡창 호남을 보전하고 적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하여 임진왜란 전체의 승기를 잡는 결정적인 해전이었다. 한산대첩으로 이순신은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였으며, 왜군은 위축되어 견내량 서쪽 지역을 넘볼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순신 장군이 승리할 수 있도록 결정적 정보를 제공해준 민초들의 활약이다. 한산대첩 바로 전날인 8월 13일 저녁나절에, 산으로 피란 갔던 당포 목동 김천손이 이순신 진중으로 헐레벌떡 달려와, 적의 대선 중선 소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정박해 있다는 결정적 제보를 했다. 적선이 73척이었으니 김천손의 제보는 거의 정확했다. 이 첩보를 바탕으로 다음날 아침 이순신 장군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마라톤 전장의 승전보를 알리고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 페이디피데스는 세계적 영웅이 되어 그를 추모하는 마라톤 경기가 올림픽의 꽃이 되었다.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우리의 김천손은 말을 먹이는 목동이다. 그 더운 여름날 약 20 킬로미터를 달려와 승리를 위한 결정적 제보를 하고도 그는 죽지 않았다. 페이디피데스는 죽었지만 김천손은 살았다. 지금도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기고 : 이순신전략연구소장  이봉수


 





편집부 기자
작성 2018.08.12 13:02 수정 2018.08.14 07:38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편집부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