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깊고 외로워서 서럽게 우는 곰배령

여계봉 선임기자 2020.2.14





올 겨울은 유독 눈을 만나보기 힘들다. 사실 눈이 시리도록 하얀 곰배령의 눈 세상이 보고 싶었다. 너무 깊고 외로워 서럽게 우는 곰배령에 가서 살을 에는 칼바람도 만나고 싶었다.

 

서울양양고속도로 개통으로 오지였던 곰배령 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졌다. 서양양 IC로 빠져 나와 조침령 터널을 통과한 후 418번 지방국도로 이동하면 곰배령 들머리인 진동 2리가 나온다.

 

3년 만에 다시 찾은 겨울 곰배령은 언제나 청정하다. 멀리 있는 듯 가까이 있는 듯 가늠하기 힘든 대간 산줄기는 바람에 쓸려 비스듬히 늘어서 있다.

 

곰배령은 겨울이 진짜다. 다소 헐겁고 여백이 있어야 더욱 아름답다.




곰배령은 야생화의 천국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야생화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그러나 깊고 외로워서 산짐승도 피하는 이곳에서는 흑과 백으로만 연출된 가난하고 가슴시린 풍경을 볼 수 있다. 먹 하나로 색의 한계를 넘나드는 수묵화처럼 흑과 백이 펼치는 극명한 대조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해발 1고지, 드러누운 곰의 배처럼 완만한 평원과 손 타지 않은 원시림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야생화가 만발하는 '천상의 화원' 곰배령. 지금은 꽃은 커녕 계곡물마저 꽝꽝 얼어버린 혹한의 날씨다. 나무도 잎을 모두 떨구고, 한 달 넘게 끊긴 눈 소식에 눈꽃조차 스러져 헐벗고 적막한 이때가 겨울 숲의 또 다른 매력을 오롯하게 누릴 기회다.

 

곰배령으로 들어가는 진동계곡 골짜기는 끝없이 깊다. 조침령 터널을 지나 방대천과 같이 설피밭길을 따라 가면 그 골짜기 끝에 곰배령 주차장이 있다. 곰배령을 오르는 들머리가 설피마을이다. 점봉산에서 단목령, 북암령, 조침령, 구룡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산자락 밑에 터를 잡은 오지마을인 이곳은 대간을 넘나드는 바람이 거세 비와 안개가 잦고 설피밭이라는 지명이 생길 정도로 눈도 많이 내린다. 겨울에 눈이 하도 많이 쌓여 눈에 빠지지 않도록 덧신는 설피(雪皮) 없이는 다닐 수 없는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강원도 역시 지난해 12월 초 이후 한 달 가까이 눈이 내리지 않았고, 기온도 높아 쌓였던 눈마저 대부분 녹아버리는 바람에 새로 장만한 스패츠는 그만 무색해져 버린다.

 

곰배령 들머리인 점봉산 생태관리센터. 예약자에 한해 하루 450명으로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곰배령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생태관리센터에서 입산허가증표찰을 받은 후 산행을 시작한다. 곰배령은 산림청 홈페이지로 탐방 신청을 해야 이곳 진동리를 통해 곰배령을 오를 수 있고,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하면 반대편 귀둔리를 통해 곰배령을 오를 수 있다. 두 군데 모두 정해진 시간까지 올라간 장소로 다시 내려와야 한다.

 

얼음이 녹으면서 흘러가는 계곡 물소리에 세속의 잡념은 절로 씻어진다.

 


아침 햇살을 받아 주변의 모든 사물이 싱그럽다. 생태관리센터에서 강선마을까지는 널찍하고 유순한 숲길이다. 이 길은 걷다보면 코가 뻥 뚫릴 정도로 맑은 공기를 느끼게 되고, 속세의 티끌마저 털어내니 발걸음조차 가볍다. 여유로움과 정겨움이 넘쳐나는 하얀 눈길을 30분 정도 걷다보면 어느새 강선마을이다.



강선마을 초입의 잣나무 숲에 들어서면 인적 끓긴 겨울의 적막은 더 깊어진다.



 

잣나무 숲에 안기듯 자리한 강선마을은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포행(布行)에 나선 구도자의 심정이 이와 같을까? 맑은 잣나무 향내에 마음을 뺏긴다. 산간 오지 강선 마을은 설량도 풍부해 설경이 아름답다. 주변은 눈물 나게 희다. 곧게 뻗은 낙엽송과 잣나무도 줄기 가지 할 것 없이 주위가 온통 하얗다. 휑한 숲, 가는 곳이 곧 길이 된다.


원시림 아래의 들꽃과 들풀은 설원에 묻혀있고, 시원한 물줄기를 토해내는 계곡도 동면에 빠져있다. 등로 주위에는 군락을 이룬 산죽이 눈을 뒤집어선 채 산객을 향해 고개를 내밀어 반긴다.


겨울의 적막은 겨울 산의 가장 큰 매력이다. 아무 거침이 없는 숲, 바위도 잔 나무도 풀숲도 모두 눈에 덮여 한결같다.



강선마을을 지나면 임도가 끝나고 좁은 등산로가 이어진다. 길이 좁다보니 나무가 양쪽에서 길을 반쯤 가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눈꽃이 핀 겨울 이 길을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얀 눈과 파란 하늘에 눈이 부실 정도다. 발밑에서 뽀득거리던 임도의 눈길과 달리 이제 발목까지 빠진다. 겨울 숲에 눈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겨울 숲에 내리는 눈은 때로 숲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숲 전체가 되기도 한다. 겨울 산에 눈이 쌓이지 않으면 숲은 깊은 안식을 취할 수 없다. 바람이 불면 은빛 가루들이 날아오른다. 마른 바람이 부는 날에는 보석가루처럼 빛나며 흩어진다. 숲에 눈이 쌓인 동안 숲도 사람도 평화롭다. 추위를 녹여 줄 수 있는 따뜻함이 있다.

 

같은 산속이지만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산새소리만 화음처럼 정적을 가른다. 천천히 걸으면 들리는 건 내가 내는 발소리와 숨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뿐이다. 발을 멈추면 오직 빈 나뭇가지를 훑는 바람 소리뿐이다. 겨울의 대나무 숲은 바람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설로 남긴다.

 

겨울 숲에 바람마저 없다면 숲은 적막하다. 겨울바람은 방랑자이다.

 


 

누구나 2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을 만큼 짧고 완만한 길이라 "밋밋하다"는 볼멘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은 땀을 흘리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 봄과 여름날에는 작은 꽃 하나하나를 관찰하며 걷다보면 시나브로 '()이 키우는 정원'에 닿게 되는 그런 곳이다.

 

겨울 숲은 산에서 소리 내는 모든 것들을 품에 안고 있다. 봄의 소란함과, 여름의 격정, 가을의 수런거림을 가라앉힌 겨울 숲은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조차 감추어 버린다. 큰 나무가 있는 겨울 숲은 위대하다. 무거운 눈이 쌓여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나무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겨울 숲은 큰 나무가 있어 더욱 아름답다.

 

해발 1,164m 고지의 너른 곰배령 평원에는 키 작은 나무와 풀이 거센 바람에 울고 있다.

 


숲은 여전히 하늘을 가리고 있다. 깊은 휴식에 들어간 숲을 벗 삼아 쉬엄쉬엄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넓게 펼쳐진 곰배령 정상이다. 곰배령은 봄과 여름에는 초록색 풀과 야생화가 지천에 피어 `천상의 화원`이라 불린다. 넓게 펼쳐진 소박한 설원은 겨울철 곰배령 만의 매력이다.


일행을 반기는 것은 거침없는 겨울바람이다. 역시 곰배령 삭풍의 위세는 소문대로 당당하기 이를 데 없다. 정상에 깔아놓은 나무데크를 따라 가면 곰배령 정상석 앞에서 길이 끊긴다. 점봉산으로 넘어가는 대간 길목은 출입금지다.



 

곰배령에 오르면 작은 점봉산(1,295m)이 어머니 젖가슴처럼 누워있고 점봉산으로 이어지는 유순한 능선이 이어진다.

 


 

곰배령은 높이 1,427의 점봉산과 가칠봉 사이의 고갯마루를 가리킨다. 설악산에서 오대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길목에 있는 점봉산(1,424) 남쪽 자락의 곰배령은 동쪽 진동리와 서쪽 귀둔리를 오가는 고개였다. 높이는 1,164,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다.




곰배령에서 설악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구름 너머로 대청, 중청, 끝청이 모습을 드러내며 반갑게 맞이한다.

 

 

산너울이 끝없이 넘실거린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넘나들며 능선에 선 산객을 밀어낸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피부에 닿는 감촉은 살을 에는 통증이 수반된다. 그래도 최대한 인내하며 버텨본다. 가슴 시리도록 하늘은 푸르고 산줄기는 낯가림을 하는 듯 멀리 떨어져 있다. 부챗살처럼 퍼지고 있는 햇살이 산줄기를 따르는 듯하다. 바라보니 아득한 산줄기 더욱 아득하다.



점봉산 반대편에 우뚝 솟은 호랑이코빼기(1,105m)와 가칠봉(1,240m)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다.



거칠게 부는 바람이 내게 묻는다. 너는 여기에 왜 왔는가. 선뜻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산은 언제나 나를 받아들여준다는 것이다. 산은 언제나 길을 열어주고 내 곁에 머물며 숲의 비밀을 알려준다.


숲에서는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서로 다르기에 숲이 더 풍성해진다고 말이다.

다른 것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이다.

남을 인정하지 않는 시정잡배 정치인들에게 곰배령이 전하는 메시지를 알려주고 싶건만.

 

하산 길은 한결 수월하다. 오를 때 보지 못했던 숲과 계곡의 아름다운 설경을 즐기며 천천히 내려서면 된다. 겨울 산은 속살을 그대로 보여준다. 숨김이 없다. 산은 하얗고 낙엽이 진 가지들은 짧은 머리털 마냥 하얀 산을 덮고 있다. 가식이 사라져 훤하게 속보이는 풍경과 마주하면서 산길을 따라 간다.


식당 천장에 매달아 놓은 지폐가 이색적이다.

 


산행 날머리 진동리 토속 식당에서 참나물, 취나물, 산고사리, 다래순 나물을 안주 삼아 곰취 막걸리를 즐긴다. 벌거벗은 산줄기가 식당 창문을 통해 다가온다. 산정을 뒤흔들던 바람도 그새 잠이 들었는지 산봉우리에 서서 바람에 맞서던 나목들은 선 채로 졸고 있다. 하늘은 산줄기에 닿을 듯 내려앉았고 산은 선정에 들 준비를 끝낸 선승이 잿빛 장삼을 여미며 무채색의 거대한 경전을 펼쳐 놓고 앉아 있는 것 같다.


막걸리를 한입에 털어 넣으며 겨울 산이 펼쳐 놓은 무채색의 책갈피를 천천히 넘긴다.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2.14 14:49 수정 2020.02.1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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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