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드림의 싫존주의] 한국은 봉준호를 키우지 않았다. 봉준호는 혼자 컸다



벌써부터 봉준호의 후광에 기대어 숟가락을 얹어 보려는 이들이 ‘봉준호생가터’ ‘봉준호기념관’ ‘봉준호동상’ 같은 것을 운운하기 시작했다. 발빠른 이들은 봉준호의 디테일함에 깃든 철학을 파헤친답시고 ‘세밀함의 미학’ 따위의 서적을 출간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이렇게까지 숟가락 얹기에 능할 수가 있는지 놀랄 따름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곧잘 쓰는 수사 중의 하나는 ‘한국이 낳은’ 위대한 감독 봉준호다. 봉준호가 한국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 감독 봉준호를 과연 한국이 만들었을까?


봉준호는 어린 시절 만화를 좋아하던 소년이었다. 그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수업시간에 교과서 여백 공간에 만화를 그려 넣고, 각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면 에니메이션처럼 이미지가 움직이는 장난 또는 작품을 만들며 놀았다고 한다. 만약 그의 장난 같은 작품을 교사가 보았다면 칭찬을 했을까 아니면 욕설과 함께 구타를 했을까? 봉준호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배경이 된 80년대 후반 고교시절을 보냈다. 정답은 단언컨대 후자다.


대학에 간 봉준호는 사회학을 전공했지만 당연히 전공과 무관한 딴짓거리에 열을 올렸다. 학보사에 만화를 그리고 영화동아리를 만들어 직접 영화를 제작해보기도 했다. 취업, 돈벌이 같은 것과 하등 무관해 보이는 봉준호의 딴짓거리에 대해 대학 측은 ‘그래도 저 녀석이 언젠가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오를 녀석’이라고 칭찬을 했을까 아니면 세상 무서운 줄 도 모르는 철부지라고 손가락질을 했을까? 정답은 이번에도 역시 후자다. 이 나라의 기성세대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청년들에게 ‘네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친절하게 물어본 적이 없다.


대학졸업 후 봉준호는 감독이 되는 길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결혼까지 하여 가정이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웨딩 촬영 알바를 하면서, 또 조연출 일을 하며 악착같이 버텼다. 그런 그에게 사회는 ‘그래 꿈을 꾸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 하면서 경제적인 부분을 비롯한 각종 지원을 했을까 아니면 ‘결혼까지 한 놈이 처자식 굶길 일만 골라서 한다’며 한층 강한 손가락질을 했을까? 비극적이지만 여기에서 마저도 후자다. 이 사회는 정상에 선 예술인들에게 과할 정도로 고개를 수그리지만 정상에 서기 위해 준비 중인 예술가들에 대해선 딴따라라고 부르며 멸시를 한다.


봉준호는 한국이 키우지 않았다. 봉준호는 혼자 컸다. 제2의 봉준호, 제3의 봉준호는 나와선 안 된다. 봉준호는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시련을 한국이었기 때문에 겪었다. 그것을 예술가로서 마땅히 겪어야 하는 일처럼 미화하지 말라. 또다른 한국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 서는 걸 진정으로 보고자 한다면 교과서에 낙서를 하는 소년에게 아주 큰 노트를 선물해 주고, 어설프게나마 영상을 찍으려는 청년에게 밥을 사주고, 데뷔를 앞둔 감독에게는 작품을 무이자 무보증으로 대출을 해 주어라.


라면만 먹어야 예술이 나온다는 소리 좀 그만하자.
고기를 먹어야 든든해서 더 오래 예술을 할 수 있다.

 


 

[강드림]

다르게살기운동본부 본부장

대한돌싱권익위원회 위원장

비운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2.18 19:16 수정 2020.02.18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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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