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비움’이 가져다준 '채움'으로 충만한 설국 한라산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설국 제주는 곧 한라산이요, 한라산은 곧 제주라는 것을 한눈에 보여준다. 한라산 허리를 가로지른 5·16도로의 정수리인 해발고도 700m 성판악은 며칠 동안 내린 폭설로 그동안 산을 찾지 못한 산객들로 새벽부터 북적인다.

 

아침 햇살에 은백색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숲속에는 가지에 매달려 축 처진 굴거리나무 잎사귀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하얀 솜이 살포시 내려앉은 숲속은 은은한 빛 감도는 한 폭의 수묵화다. 풍성하게 눈을 머리에 인 삼나무 터널을 통과하니 몸은 사바세계, 마음은 극락세계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푸른 잎사귀를 늘어뜨린 굴거리나무가 하얀 솜털을 덮어쓴 채 엷은 햇살을 받으며 졸고 있다.



숲길은 성널오름 자락을 끼고 삼나무 조림지인 속밭을 지나 사라오름으로 이어진다. 성널오름과 사라오름은 한라산의 동서를 잇는 산줄기에 이웃해서 솟아 있다. 덩치로 치면 성널오름이 훨씬 우람해서 숲속에서도 그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본래 성판악 코스의 지명은 바로 저 성널오름에서 따왔다. 서귀포시 남원 지경에서 바라볼 때 오름 어깨춤에 수직 절벽이 병풍처럼 산자락을 휘감으며 솟아오른 모양새가 마치 나무판자로 성을 두른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를 한자로 차용하면서 성판악(城板岳)으로 불린다.

 

돌계단과 목재 테크가 번갈아 이어지는 길은 어제까지 내린 폭설에 묻혀 있지만 그래도 낮은 산의 호젓한 숲길처럼 평탄하다. 성판악에서 사라오름과 진달래밭을 지나 정상에 이르는 코스는 한라산의 등산로 중에서 가장 길면서 완만하다. 사방이 훤히 내다보이는 전망대도 없이 숲길을 따라 이어지는 밋밋한 길은 어쩌면 설악산의 호쾌한 암릉이나 지리산의 장엄한 첩첩산줄기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시시해 보일 듯싶다. 그렇지만 한발 두발 내딛으며 숲길을 가득 메운 조릿대 댓잎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나목의 울림을 느끼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사라오름 자락에 이르면 밋밋하던 등산로가 제법 가파른 경사를 이룬다. 연이어지는 계단을 올라서면 갑자기 시야가 트이는 평원에 들어선다. 해발 1500m 진달래밭이다.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 정상까지는 한 시간 남짓 끝없이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는 부드러운 초가집 모양의 백록담 정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면서 귓불을 스치는 바람이 포근하기만 하다.

 

따사로운 햇볕에 하얗게 피어난 설화가 눈을 황홀케 만든다.

 


시선 아래로 스쳐 지나온 성널오름과 사라오름이 내려다 보인다. 한라산이란 이름은 원래 은하수를 끌어당길 수 있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산이 높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밖에도 부악, 두무악, 영주산, 진산 등 아름다운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 섬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 제주 사람들에게는 한라산이 곧 제주도였다.

 

원추형의 한라산 그 정점을 다섯 갈래로 분할하는 등산로 영실, 어리목, 돈내코, 관음사, 성판악 코스는 산으로 이어지는 길일 뿐 아니라 백록담의 신성함을 제주 사람들과 연결하는 질긴 끈이라 할 수 있다. 한라산 곳곳에는 화산 활동으로 생긴 수많은 원추형의 작은 화산들이 오름을 이루고 있는데 그 수는 무려 360여 개나 된다. 이들은 백록담을 호위하듯 솟아있다.

 

한라산 정상은 한겨울에도 초록빛을 띠는 구상나무 주단을 깔고 백록담 외벽이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며 솟아있다.

 


 

맞은편으로는 성널오름과 논고악, 동수악을 비롯한 제주 동부지역의 오름이 한 눈에 잡힐 만큼 전망이 시원스럽다. 수평선 맑은 날에는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아련하게 다가온다. 구름바다 위로 도도록이 솟아 오른 한라산은 동화 속 신비한 나라의 궁전 같다. 하늘금을 그리며 해안선까지 완만히 이어지는 부드러운 산세는 궁전을 떠받치는 성채와도 같다.



솜사탕 풀어놓은 듯 산자락을 휘감은 운해가 달팽이 걸음으로 느릿느릿 흘러간다.

 

정상의 돔 지붕과 굴뚝에도 눈꽃이 활짝 피었다.


드디어 산행 시작 3시간 반만에 정상에 도착한다. 국토의 마침표 같은 섬의 한가운데 극적으로 솟아오른 한라산의 높이는 1,950m로 남한 최고봉이다. 발 아래로 백록담의 드넓은 분화구와 능선이 구름바다 위에 왕관처럼 떠 있다. 한라산은 제주도 사람들의 숨결과 역사를 그대로 안고 있는 산이다.

 

수직 깊이 100여m 남짓한 분화구는 그야말로 바람의 도가니다.

 


고대 로마 원형경기장의 힘찬 함성이 바람으로 들끓어 오른다. 분화구 사면의 골짜기엔 서설로 생긴 주름살이 그로테스크한 조각 같다. 왕관을 휘감은 운해가 수평선으로 구름 이랑을 갈아내며 검은 바위와 하얀 눈이 빚은 백록담 수묵화에 자막을 긋는다. 가까이에는 햇빛 담은 하얀 눈꽃이, 멀리에는 구름 아래로 성산 쪽 바다가 지평선 위로 슬며시 올라온다. 날씨가 아주 맑으면 일출봉과 우도까지 조망된다. 햇빛 좋고 티끌 하나 없는 맑은 날, 한라산을 오르는 행운에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백록담 동쪽 화구벽은 분화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다.

 

계곡 너머로 장구목이 용골찬 기개를 지닌 설산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 있다.

 


 

장구목은 거대한 장구가 가로놓여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붙여진 오름이다. 병풍처럼 둘러싼 바위는 정상의 화구 북벽에서 삼각봉까지 이어진다. 왕관 능선을 따라 관음사로 내려서는 길에는 구상나무 고사목 무리가 길을 안내하듯 도열해 있다. 나무 계단을 따라 구상나무 숲에 들자 바람이 잦는다. 구상나무는 거친 바람마저도 제 몸으로 갈무리해서 구상나무 숲에서는 겨울에도 푸른 이끼가 시들지 않는다. 저녁노을에 반짝이는 바위벽이 마치 왕관처럼 빛난다고 해서 왕관바위라 불리는 왕관릉에 이르자 용진각 계곡을 둘러싼 암릉이 백록담을 호위하듯 당당한 위세를 드러내고 있다.

 

한라산에서 가장 험하고 깊은 계곡을 지닌 용진각 일대는 백록담 북벽과 장구목에서 발원하는 탐라계곡의 원류이다. 그 아래에 히말라야 원정대의 훈련장소인 용진각대피소가 있었지만 2007년 태풍 나리때 백록담 북벽에서 흘러내린 바위가 급류에 떠밀려 내려오면서 용진각대피소 건물을 강타, 지금은 흔적만 남긴 채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는 동계 훈련 중인 대원들의 텐트가 대신하고 있다.


산정의 티 없이 깨끗한 하늘 아래 동부해안의 쪽빛 바다 풍광이 일품이다.

 

 

왕관릉에 앉아 있으면 봄날같이 온기를 머금은 햇빛 때문에 몸이 저절로 녹는다.

 


 

현수교를 건너 삼각봉 바위벽 허리를 관통하며 오르막길을 오른다. 하얀 수피를 드러낸 고채목들이 아찔한 절벽 자락에서 허공을 향해 가지를 뻗어 가녀린 겨울 햇살을 마신다. 폭설이 내려 나무의 줄기까지 눈이 쌓이면 고목들은 필경 지나는 나그네들에게 제 몸통을 폭설 속의 징검다리처럼 내어줄 것이다. 낙석방지 펜스를 통과하여 도착한 삼각봉 아래에는 사라진 용진각 산장을 대신해 지은 삼각봉대피소가 있다. 솔개의 머리를 닮아 조선시대에는 연두봉(鳶頭峰)이라 불리던 삼각봉을 뒤로 하고 본격적인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수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 키 만큼이던 보득솔이 이젠 제법 자라 숲을 이루며 햇살을 가린다.


산길은 눈빛으로 하얗게 넘쳐나고 맞은편 봉우리들은 산 그림자로 그윽하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산야가 푸를 때는 오히려 때 묻은 옷을 걸친 것처럼 보이지만 온 산이 시들고 조락하는 이 겨울에야 송백의 참 모습을 나타낸다. 키는 난장이지만 또렷한 잎 매무새와 진한 초록은 은세계의 백미다. 그들 군락 앞에 다가가 눈 위에 무릎 꿇고 감상하며 저들이 뿜는 산소를 들여 마시니 내 허파가 요동친다.


겨울나무들에게 두런두런 말을 걸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하게 차오른다.

 

탐라계곡 나무들이 목화솜처럼 풍성한 눈꽃을 피우고 있다.

 


 

제법 경사진 능선을 내려서면 용진각에서 흘러내리는 탐라계곡과 만난다. 탐라계곡을 건너 관음사코스의 들머리인 야영장까지는 3km, 기복 없이 평탄한 숲길은 산행 날머리 관음사 안내소까지 이어진다.

 

겨울 산의 매력은 적막과 비움이다.

람 소리 외는 묵언의 침묵과 잎새를 떨구고 홀로 선 나목의 비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웅변인가.

다소 헐겁고 여백이 있어야 인생이 아름답다.

겨울은 비우는 계절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려야 비움에 다가서는 것이다.

 

한라산에서 만난 비움은 나 자신의 건강한 '채움'이 되리라.

 

<사진제공> 사진작가 운야 임덕연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2.21 13:03 수정 2020.02.2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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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