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산사기행] 양양 휴휴암

전승선

 전승선 2020.3,10


 




양양 휴휴암

 

쉬고, 쉬고 또 쉬고

 

일하는 건 쉽다. 하지만 쉬는 건 어렵다. 일이 곧 생존이기 때문이다. 쉬는 건 생존을 잠시 보류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쉼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정신낭만에 불과하다. 서글픈 일이지만 그렇다. 특히 창작에 시달리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생각노동을 하고 있다. 생각노동은 육체노동보다 그 강도가 열배는 더 될 것이다. 몸의 세포들은 일하는데 길들여져 있고 쉬는 데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그건 몸의 잘못이 아니다.

 

쉬고, 쉬고 또 쉬고 싶다. 정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고 싶다. 쉼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쉼은 내부에서 온다. 내부의 에너지가 임계점에 도달해야만 쉼에게 항복할 수 있다. 그러니까 쉼은 삶의 마지막 보루인 셈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쉼이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쉼은 행복이거나 불행이거나를 가르는 잣대가 아니다. 행과 불행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어쩌면 마음일지 모른다.

 

깃발은 바람이 흔드는 것인지 깃발이 스스로 흔드는 것인지 알 수 없잖은가. 깃발을 바라보고 있는 내 마음의 작용이라고 책으로 읽고 법문으로 주구장창 들어도 그게 어디 쉽게 깨달아 지는 것이던가. 바람도 깃발도 내 마음도 다 한통속일지 모른다고 싸잡아 비난하며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돌아와 이제 거울 앞에 선 누님이 되고 나서야 내 마음이 깃발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 알게 됐다. 그러면서 나는 내 마음과 쉼은 어쩌면 동의어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쉼은 순수의 회복이다. 의식의 표면을 뚫고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관념의 지배에서 벗어나 본래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행과 불행이라는 관념이 만들어낸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지 모른다. 그 마음의 병의 사슬을 끊는 일이 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관념이 나를 조종하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 속에서 두려움을 키우고 그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다른 관념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모든 관념으로부터 벗어날 때 진정한 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가는 길이 바로 쉼일 것이다.

 

일체를 놓고 전부를 쉬고 모든 것을 비워내십시오.

그것을 어떻게 놓고 비워내느냐는 생각하지 마세요.


무여스님은 이렇게 쉬고, 쉬고 또 쉬라고 말한다. 쉼으로부터 얻어지는 깨달음을 놓치지 말하고 하신다. 쉼 자체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리석은 나는 쉼을 위해 쉼을 생각한다. 쉼 없는 삶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동쪽 바다로 겨울여행을 떠나 휴휴암에 왔다.

 

휴휴암, 팔진번뇌를 쉬어가는 곳이라고 했다. 어리석은 마음, 시기와 질투를 내려놓고 쉬고 또 쉬라고 한다. 겨울 햇살이 나직이 내리는 바다위로 한가로운 갈매기가 날고 멀리 상선과 어깨를 나란히 한 수평선이 고요하기만 한 휴휴암이다. 언젠가 왔던 여름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는데 겨울 속의 휴휴암은 적막하기만 했다. 바다는 저 홀로 푸르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지혜관세음보살은 말이 없다. 여기까지 지고 온 팔진번뇌는 여전히 마음에 있는데 겨울 햇살 속을 가르며 달려오는 바람이 뺨을 때리며 지나갔다.

 

겨울은 봄의 전령이 타고 오는 마차다. 봄은 겨울마차를 타고 바다로 오고 있었다. 저 수평선 너머로 봄의 전령이 달려오고 있었다. 쉼을 얻고자 했던 겨울여행은 휴휴암에서 절이름처럼 쉬고. 쉬고 또 쉬었다. 생각이 쉬었고 의식이 쉬었고 정신이 쉬었다. 봄의 전령이 달려오는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나는 깃발도 바람도 흔들림도 내 마음의 작용이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러니, 사실 나는 쉼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오기 위해 쉼을 변명했는지 모른다. 내가 쉬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쉬고 바람이 쉬고 휴휴암이 쉬고 있었을 것이다.

 

여행, 나는 여행이 수행이라고 믿고 있다. 추우면 추운 데로 더우면 더운 데로 떠도는 것이 여행 아니던가. 푸른콩 지구별에서 인간몸으로 태어났으니 이 또한 즐거운 여행이 아닐 수 없다. 60조의 세포로 이루어진 내 몸을 순례하듯 푸른콩 지구를 여행하며 마음의 수행을 쌓아간다. 생존이 여행이고 삶이 수행이다. 일이 쉼이고 쉼이 일이듯이 말이다. 생존을 위해 일한다고 핑계를 댔지만 오늘도 나는 60조의 세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내 거룩한 몸의 주인인 마음을 돌린다.

 

그러니, 나여 사랑하라. 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 생존하지 않고는 푸른콩 지구별에 온 의미가 없지 않은가. 이왕 왔으니 마음 밖으로 나갈 때까지 쉬고, 쉬고 또 쉬며 즐거운 소풍을 마쳐야 하지 않겠는가.

 



전승선 기자 poet1961@hanmail.net





전승선 기자
작성 2020.03.09 11:13 수정 2020.09.14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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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