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열전 靑年 列傳] 구구절절 쓰고 싶은 시인 오혜린

내가 죽고 싶었던 이유는 사실 너무 살고 싶어서였다

 

 



많은 것을 이뤄나가고 있는 요즘 이런 생각을 자주한다. 내가 만약 평범한 가정에, 돈 걱정 집안 걱정 없는 소녀로 행복하게 자랐으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남을 위해야 하는 학생회장을 하지도, 돈 걱정으로 알바를 하면서 사회를 먼저 맛보지도, 무엇보다 내 감정을 모두 토해내는, 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안했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겪은 모든 것들이 앞으로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욕심이 많았다. 맞지 않는 핑크구두를 버리지 못하고 껴안고 있는 것도 내 욕심이었고, 짧게 몇 시간 만난 친구도 헤어지기가 너무 아쉬워 모든 마음을 퍼주곤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낚시를 하러 갔었는데 물고기가 내 바늘에 잡히지 않아 너무 분해서 괜히 다른 사람 낚싯대를 보며 저게 더 좋다고 울면서 떼를 쓰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작은 일에도 마음을 쓰고 쉽게 울었다. 크면서 욕심은 더욱 큰 부분으로 나의 가치관을 차지했다. 그래서 매번 그 욕심을 위한 과정의 난관에 부딪혀야 했고 그때마다 나는 남들보다 몇 배로 무너졌다.

 

자살을 수없이 생각한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매일 이 생각을 하며 하루를 행동한다. 더 힘든 사람들을 생각하면 꼴값 떠는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 내가 무너졌던, 스스로 온 힘을 다해 흔들렸던 이야기를 써내려보고자 한다.

 

내가 남들보다 몇 배로 무너졌던 이유는 마음이 여린 것도 있었지만, 부모님의 빈자리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 부모님은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고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것을 보는 생활에 나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동생과 찬물로 부운 컵라면의 라면과자를 씹어 먹으며 배를 채우거나, 늦은 밤 나보다 무서울 동생을 놀아주다가 재우며 지냈다. 항상 위태롭던 부모님 밑에서 말할 곳 없는 불안함을 속으로 억누르는 법을 익혔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부모님이 계셔서 빨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부모님 자랑을 하는 친구들에 껴서 부모님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정말 좋았다. 지금에 와 돌이켜보면, 나에게 가정이 완벽했던 시절은 그 때 뿐이었다. 그때가 내겐 가장 평범했고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가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옷장에 있던 옷가지들과 눈뜨면 보이던 화장대의 화장품들도 모두 사라졌다. 엄마가 잠깐 어디를 나간 것이라고, 엄마 물건이 나와 달라고 울면서 온 집안을 뒤졌다. 나는 아직도 그 빈 서랍장을 여닫을 때 느꼈던 공허함과 소리를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싫다. 나를 떠나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이 엄마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필요했던 나는 사람에 대한 집착을 시작으로 남들보다 잘난 무언가가 있어야만 했다. 사람들이 내 곁에 남는 이유가 있다고 그 어린 나이에 굳게 믿었다. 나에게 자신들이 필요한 무언가가 있어야만 내 곁에 남는다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어낸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욕심은 나의 사소한 생활 부분에서 남들에게 보이는 사회적인 측면으로 더욱 커졌다.

 

엄마가 사라지고 난 뒤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동생과 책가방 두개 달랑 메고 친할머니 댁으로 왔다고 한다. 사실 중학교 이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힘든 기억이었는지 다 잊어버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다시 충주 노은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친구네 경운기를 얻어 타고 학교를 가던 그 시골, 노은은 내가 엄청난 성장을 하도록 도와준 곳이었다. 나는 노은에서 처음으로 따뜻한 친구들을 만났다. 할머니와 처음 살기 시작했을 때도 작아진 옷을 입고 다닌 내게 거지같다고 놀리는 일진 친구들과 어울렸다.

 

드라마 응답하라시리즈에서 보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옆집, 앞집에서 과일, 전 등 먹을 것을 갖다 주는 장면이 나오는 데, 딱 노은이 그랬다. 학교친구들이 다 근방에 살았고 나는 외로울 틈 없이 우르르 놀러가 놀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어울려 놀다가 잠들어도 아무 문제없는 순수한 친구들과 그대로 중학교까지 올라갔다.

 

그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다 같이 놀 수 있는 놀이를 구상해 갔고, 항상 앞에서 친구들을 모아 함께 하려 했다. 엄마의 사랑 같은 리더십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 학생회장이 되었다. ‘회장이라는 것은 내 인생에서 꿈도 꾸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 후 나의 마음 한구석에서 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하지만 강하게 일어났다. 회장의 역할 때문에 남들 앞에 서야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나의 실질적인 능력을 성장시키리라 다짐하며 가장 먼저 내 앞에 놓인 공부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내가 내 삶을 위한 노력이란 것을 하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13명 되는 한 학급의 반장을 하며 나름 잘 지내다 1학년 겨울방학, 삼성에서 하는 이대 합숙 공부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고 프로그램에 운 좋게 참여했다. 공부에 대한 신념의 전환점을 맞게 된 순간이었다.

 

그 곳에서 나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단어를 체감했다. 같이 왔던 공부 잘하는 친구들에게도 많은 것을 느꼈지만 내가 더욱 크게 느낀 것은 이런 큰 대학교가 있으며 또 이런 학교에 다니는 언니들은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일까 생각하며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크게만 느껴졌다. 엄청난 패배감이었다. 한 달을 합숙하며 공부법도, 지식도 배웠지만 나는 나를 채찍질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그 캠프 후 돌아와 잠도 자지 않고 책에 매달렸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그때 알았고 그 동안의 시간이 아까웠다. 나는 5시에 일어나 밥을 먹으며 처음 보는 인강이라는 것을 듣고 영어 단어를 외우며 등교했고 적은 인원의 우리 학교 수업은 과외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최대한 선생님께 많이 질문하고 집중했다. 야간자율학습 전 저녁시간에도 집 가서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콩자반 하나를 밥과 싸가지고 다니며 공부했다. 집에 와서도 잠을 잘 수 없어 나태해지는 것 같으면 새벽에 공부의 신'같은 영상을 봤다.

 

그 결과 시험마다 나는 거의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만족할 수 없었고, 시내에 있는 학원에 가서 그 애들과 실력을 비교해보고 싶었다. 형편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정말 공부에 미친 중딩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학원을 다닐 수 있도록 겨울날 찬물에 배추를 씻는 김치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셨다.

 

그러던 중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내가 왜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지, 나는 왜 이런 집안 환경으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등 감당할 수 없는 질문들이 나에게 쏟아졌다. 가만히 서있으면 세상이 빙빙 돌고 미쳐버리는 것 같았다. 나 스스로를 옥죄던 것이 일종의 공황장애로 나타난 것이었다. 할머니의 건강이 공장에 다닌 후로 급격히 나빠졌다. 작업을 할 때 주로 쓰는 엄지손가락이 옆으로 돌아간 채 굳었고, 내가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유방암이 다시 도져 남은 가슴마저 도려내야 할 정도로 속이 상하고 있던 것이다.

 

모든 게 내 책임 같았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힘든 삶이 지속되는 것이니, 다 같이 죽을 수 있게 집에 불을 내려고도 했다. 멀리서 일하는 아빠에게 남은 죄책감을 씌어주겠다고 악랄한 계획까지 하며 말이다. 이런 스트레스를 가지고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매일 죽지 못해서 울었다. 책을 넘기다가도 눈물이 났고, 길을 걷다가도 주저앉아 울었다. 내가 공부하기 어려운 조건의 시골에 사는 게 싫었고, 그런 집에라도 들어가면, 있는 사람이 엄마가 아니란 게 너무 억울했다.

 

이런 상황을 만든 멀리 있는 아빠가 죽도록 미웠지만, 또 고생하시는 할머니가 마음에 걸려서 엄마를 미워하는 척 하는 상황도 참을 수 없었다.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 가만있어도 주변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고, 터질 것만 같아서 가슴을 치면 그 안이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듯한 허무함을 견디기 버거웠다. 그래서 나는 병원으로 도망쳤다. 할머니와 정신병원 앞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제일 가슴 아프게 떠오른다. 약도 먹었지만 그냥 몽롱해졌고, 울다가 화내는 대신 잠드는 게 전부였다.

 

살고 싶어서 발버둥친 것이라는 걸 그 때는 몰랐다. 나는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아빠와 동생과 함께 살게 되었다. 전학처럼 입학해서 노은 학교의 전교생 수가 한 학급인 큰 학교의 수많은 아이들의 텃세를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았다.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단단해져 있었다. 겨우 반장이 되어서는, 부모님을 가지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친구가 주변에 득실거렸고 함께 무엇을 이뤄내고 싶다는 생각은 매번 좌절되었지만 나는 이런 친구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함께 무엇을 해나가고 싶다그게 내가 회장을 했던 이유였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이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믿어줄 수는 없는 것임을 모르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그러던 중 부회장선거에서 떨어졌다. 어떤 선생님께서 다른 친구를 불러, 내가 부회장이 어떻게 되냐고 어머니도 안계시고 가정도 힘든데 네가 대신 나가라고 했다는 것을 듣고 나는 처음으로 엄마를 증오했다. ‘내가 용을 쓰고 열심히 해도 내게 놓여 진 상황이 나를 막는 다는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라고 일기를 썼었다. 내 능력 탓이 아닌, 엄마가 없다는 상황 뒤로 도망쳤었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도망치는 겁쟁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스스로가 그럴만한 자격이 되도록 노력해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모두에게 내 진심을 알리려 애쓰기보단 진심을 공유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만들어야지 라고도. 그리고 그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꾸준히 성장하겠다고. 난 고급일식집, 새벽편의점, 패밀리 레스토랑 알바 등 열심히 돈을 벌어 좋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데 지출하고 있다.

 

난 아직 19, 앞으로는 그 이상의 시간들을 달려갈 것이다. 앞으로 더 힘들고 좌절할 시간들은 더더욱 자주 찾아올 것이다. 지금 난 다른 사람이 보면 별 볼일 없던 어린 겁쟁이가 하기에는 꽤 멋진 일을 하고 있다. 고등학교 학생회장, 충북학생의 인권을 대표하는 자리 등 모든 사람을 위한 일... 난 겁쟁이였기에 작은 일을 배려하는 법과 집단을 더 챙길 수 있는 습관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역경 앞에서 아주 격렬히 흔들렸으면 좋겠다. 너무 힘든데 거기다 대고 더 힘내라고 하지 않고 싶다. 지나고 보면 다 내 자산이 되니 삶에 조금 더 미련을 가져보라고 격렬히 흔들렸지만 죽지 않은 겁쟁이로서 말해주고 싶다.


전명희 기자
작성 2018.08.17 10:08 수정 2018.08.2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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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