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산사기행] 지리산 도솔암

전승선




지리산 도솔암

 

 

봄꽃이 피면 그곳에 가고 싶었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그곳 지리산에 가고 싶었다. 봄엔 꼭 그곳에 가고 싶었다. 서울의 봄은 교활하다. 영악하고 미덥다. 잘생긴 기생오라비처럼 사람들을 잘 홀린다. 탐닉주의자들에게 서울의 봄을 던져주고 나는 지리산으로 떠났다.

 

그대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가끔씩 하느님도 눈물을 흘리신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산 그림자도 외로움에 겨워

한 번씩은 마을로 향하며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서 우는 것도

그대가 물가에 앉아있는 것도

 

사월의 봄은 괜히 정호승 시인을 떠올리게 했다. 지리산으로 향하면서 나는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가끔씩 하나님도 눈물을 흘리신다고 혼자 웅얼웅얼거리며 남쪽으로 달렸다.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 흘리는데 나는 외로워서 지리산으로 가고 있었다. 지리산의 봄과 연애질하며 외로워서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떠났다.

 

지리산 초입에 도착하자 연약한 작은 생명들이 햇살 속에서 속살거리며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이 애처롭고 아름다운 생명들이 모여 지리산이 되었을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아우성치는 여린 생명들에게 미안했다. 이건 진심이었다. 중뿔나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 나 자신을 보며 어이없어서 웃었다. 사는 것도 모르는 내가 발밑에서 아우성치는 보이지 않는 생명까지 걱정하는 게 우스워 빈 하늘을 보며 깔깔깔 웃고 말았다.

 

그곳, 지리산 깊은 골짝에 히말라야의 바람이 되어 돌아온 스님이 계신다. 벌써 두어 해 산문을 걸어 잠그고 수행에 정진하는 스님을 찾아 도솔암으로 향했다. 방사한 지리산 곰이 산다는 그 골짝 두 갈래 길에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어느 쪽으로 가야 히말라야의 바람이 되어 돌아온 스님이 있는 곳일까 생각하다가 나는 오른쪽 길을 택했다. 전날 내린 비는 돌 틈마다 쏟아져 내려 내를 이루고 돌계단은 미끄러웠다. 산을 덮은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있는데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웠다.

 

한참을 올라가다가 이정표가 나왔다. 아니 이럴 수가, 도솔암이 아니었다. 허탈한 다리를 부여잡고 다시 내려왔다. 다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스님과 통화가 되었지만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지리산 곰이 사니 조심하라고 푯말이 내게 겁을 주었다. 수미산 꼭대기에 있다는 도솔천만큼이나 도솔암은 멀고 먼 곳에 있었다. 업이 많아 먼 것인지 멀기에 갈 수 없는 업이 있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도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떼고 또 떼었다.

 

도솔암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 있고 문 앞엔 히말라야의 바람 같은 스님이 웃고 계셨다. 나는 염치도 없이 지고 온 속세의 근심 덩어리를 부처님 앞에 내려놓고 합장을 했다. 도솔암에는 지리산의 봄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밤안개에 파묻혀 버린 도솔암에서 나는 헤겔이 어렴풋이 알았던 것처럼 관념론적 절대정신의 애매모호한 담론을 펼치며 오만방자하게 스님의 심기를 건드렸다. 히말라야의 바람 같은 스님은 이미 바람이 되었는지 성냄도 없이 내 꼬인 뇌를 풀어주는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 스님 제 오만방자함을 용서해 주시길....

 

나는 도솔암에서 히말라야의 바람이 되어 돌아온 스님이 전해주는 바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스님의 이야기는 바람이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흐르는 물이 되었다가 아름다운 은하가 되어 지리산으로 흐르고 있었다. 지리산은 어리석은 사람이 오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맞는 말 중에 진짜 맞는 말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지리산이 있다는 건 다행 중 다행이다.

 

지리산 깊고 깊은 산중에 있는 듯 없는 듯 앉아있는 도솔암은 하늘지붕을 머리에 이고 봄의 안부를 전해주고 있었다. 나는 도솔암에서 봄을 보았다. 히말라야의 바람이 되어 돌아온 스님이 봄이었다. 안개에 묻혀 면벽하고 있는 돌탑이 봄이었다. 빈 하늘을 날아가는 새가 봄이었다. 곰 조심하라는 푯말이 봄이었다. 지리산이 봄이었다. 봄을 만나러 온 나는 수지맞았다. 서울의 봄을 탐닉주의자들에 던져주고 떠나온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봄을 찾아 나는 지리산까지 왔다. 와서 보니 봄은 내 안에 있었다. 봄을 만나고 내려오는 길, 발걸음이 가볍다. 발걸음이 가벼우니 마음까지 가벼웠다. 밤새 내린 비는 시냇물이 되어 콸콸콸 흐르며 지리산의 동맥이 되고 있었다.

 

마음에 꽃이 핀다.

산에도 꽃이 핀다.

 



전승선 기자 poet1961@hanmail.net






전승선 기자
작성 2020.03.16 11:14 수정 2020.09.14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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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