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택의 사랑방 이야기] 누가 아직도 흑인을 ‘깜둥이’라고 하는가

정홍택

 


소설 <앵무새 죽이기> 이 소설을 읽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오래전 학교시절에 우리는 소설 <검둥이 톰 아저씨(Uncle Tom’s Cabin)>를 읽었다. 이 책을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읽었고 흑인 노예 해방에 대한 그의 주장에 확신을 주었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앵무새 죽이기>21세기를 사는 독자들에게 같은 크기의 또 다른 감명을 주고 있다. 미국 고등학교에서는 이 책을 필독서로 선정하여 학생들에게 졸업 전에 독후감을 한 번 이상 꼭 쓰게 한다.

 

1991년 미국 국회도서관은 미국 국민들을 상대로 독서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앵무새 죽이기>가 성경 다음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발표했다. 2001년 시카고 시청에서 비슷한 조사를 한 바 이번에도 이 책이 성인 필독서 1위에 뽑혔다.

 

2006년에는 영국 도서관 사서들을 상대로 모든 어른이 죽기 전에 꼭 한 번 읽어야 할 책을 한 권 추천해 주시요하는 질문서를 돌렸는데 본서가 뽑혔다. 오래전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그레고리 펙이 주연하여 아카데미 상을 받기도 했다.

 

부끄럽지만 이제야 딸의 권유로 이 책을 구입해 첫 페이지를 열게 되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나는 깊은 감동에 휩싸였다. 좋은 책이란 독자들을 정신적으로 성장시킨다고 하는데 바로 그런 일을 내게 해 주었다.

 

나는 미국에 와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처음엔 너무 좋아서 예수님이 왜 진작 불러주시지 않았을까 안타까워하며 성경에 깊이 침잠하기도 했고, 미친 듯이 전도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에 두 가지 의문이 싹텄다. 하나는 교회에서 믿는 사람들끼리 왜 저리 심하게 싸울까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왜 미국의 <바이블 벨트>에서 인종차별이 더 심할까였다. 오랫동안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그럭저럭 살아오는 동안, 믿음은 서서히 식어 감을 느끼면서도 이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 소설의 무대는 1930년대의 앨라배마주 어느 시골이다. 이 작은 동네에 큰 소동이 벌어졌다. 가난한 백인 농부가 한 흑인 청년을 자기 딸 강간 혐의로 고소를 했단다. 당시 흑인이 이런 혐의로 백인에게서 고소를 당하면 무조건 사형 선고를 받는 것이 예외 없는 현실이었다. 물론 사법적인 절차는 밟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 요식행위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동네에서 가장 존경받는 고참 변호사가 그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너 명의 양심적인 사람만 빼고 온 동네가 들고 일어났다. “백인 원고를 상대로 흑인을 변호해 주다니...” 전통을 중히 여기는 집안 어른들이 가문의 망신이라고 그를 찾아가 간곡히 말리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두 자녀가 친구들에게서 모욕을 받는다.

 

저녁 식사 후 딸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모두 저렇게 반대하는데 왜 꼭 아빠가 이 일을 해야 해요?” 아버지는 딸을 무릎에 앉히고 자상하게 대답해 준다. “저 청년을 변호해 주지 않으면 내가 교회에서 기도를 할 수가 없구나. 너희들도 이 아빠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힘들더라도 좀 참아주면 좋겠다.”.

 

소설의 상황은 우리와 동떨어지지만, 이야기가 주는 의미만큼은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책을 읽으며 믿는 사람들은 진정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고, 일반인들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하루아침에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아니고 이런 무명의 양심적인 백인 신자들의 자기희생적 의지가 만들어낸 역사의 산물이란 것을 배울 것이다. 혹 미국의 민주주의를 선망하는 사람이라면 초등학교 1학년에서 시행하는 학생들 간의 시사 토론을 접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인데 이 책은 그런 나의 바램 또한 배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통속소설처럼 변호사가 법정에서 속 시원하게 열변을 토해서 배심원들을 감동시켜 결국 승리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앵무새 죽이기>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고전 소설 선두에 서게 한 이유이다. 정의가 언제나 승리하는 사회는 아무 데도 없다. 그런데 왜 제목이 <앵무새 죽이기>이지? 앵무새는 한 번도 안 나오는데. 답은 책 속에 있다.

 

왜 어떤 한국 사람들은 아직도 흑인들을 가리켜 깜둥이라고 하지?” 이런 한국인들이 바로 무고한 앵무새를 죽이는 사람들이다. 책을 읽으면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정홍택]

서울대학교 졸업

KOCHAM(Korea Chamber of Commerce in U.S.A.) 회장

MoreBank 초대 이사장

Philadelphia 한인문인협회 창설 및 회장

 

정홍택 hongtaek.chung@gmail.com


전명희 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3.19 11:51 수정 2020.09.14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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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