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인류의 거듭남이어라

이태상

 


예부터 말이나 어떤 형상(形象)으로 표현되는 순간 그 내용 실체(實體)와 실상(實相)은 증발(蒸發)해 버리듯 사라진다고 했던가. 촛불이나 모닥불처럼, 산불의 불꽃 또는 연기처럼, 이슬방울이나 폭포수,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泡沫) 그리고 물안개처럼 아무 흔적(痕跡)도 없이....

 

이는 거품문명이니, 거품경제니, 옷이 날개라는 식의 포장이나, 소리만 요란하다는 빈 수레와는 달리 속이 익고 찬 문화나 사람은 겉치장이나 겉치레로 눈가림이나 입에 발린 빈말 립서버스(lip service)’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일 게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물론이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골리앗 장수와 다윗소년(David and Goliath)’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 전태일 열사, 그리고 모조품 같은 픽션이 아니라 진품의 실화 같은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 같이, 말과 글 대신 그들의 행동과 삶과 그리고 죽음 자체로 인류의 사표(師表)가 된 수많은 경우에서 그 실례(實例)를 찾아볼 수 있으리라.

 

그건 그렇다 치고, 요즘 한국에서 미성년자 성착취물을 만들어 텔레그램에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조주빈의 ‘n번방 사건을 계기로 최대(最大)가 아닌 최소(最小)로 축소(縮小)해서, 말하자면 일종의 미니멀리스트(minimalist)’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고차원(高次元)의 영적(靈的)이고 정신적인 사랑은 차치물론(且置勿論)하기로 하고, 형이하학적 (形而下學的)으로 최저선(最底線 bottom line)인 육체적 욕정(慾情)의 대상으로서의 제 눈에 안경이란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 같지 않은 말도 좀 해보리라.

 

몇 년 전부터 중국에선 평평한 절벽 가슴으로 고민했던 여성들이 중국판 웨이보에서 평면가슴 대회를 열어 화제가 되었다. 그 후로 중국 여성들이 저마다 웨이보에 평면가슴대회라는 태그를 걸고 자신의 평평한 가슴을 찍은 인증샷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고 중국 포털 왕이 뉴스가 전했다.

 

이 대회는 지난 2014년부터 중국 인터넷에서 진행되었는데 우승자를 뽑는 것이 목적이 아닌 인증대회라고 한다. 남성이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성임을 증명할 수 있는 목선이나 입술을 함께 공개하는 규정이 있다. 많은 여성 네티즌들이 자신만 가슴이 작은 게 아니라는 점에 위로를 받았다거나 부모가 준 몸매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중국에선 여성의 외모에 대한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색적(異色酌)겨드랑이털 사진 콘테스트를 개최해 또 화재가 되기도 했다. 이 행사를 주도한 중국의 여성운동가는 우리는 몸에 나는 털을 밀지 안 말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고 수많은 여성들이 동참했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라 할까 아니면 대조적이라 할까. 얼마 전 뉴욕 브루클린에선 작은 남성 성기(性器) 대회가 열린 가운데 한 남성이 우승했다. 이곳 킹스카운티 살롱 식당에서 제3작은 성기 대회결선이 진행되었는데 위스콘신주()에서 온 테일러 캠벨(24)이란 청년이 수백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상금과 함께 우승 토로피를 받았다. 그는 매력적인 여친도 있는 매력남이었다.

 

이 대회는 세계 어느 나라 남자도 참가가 가능하고, 작은 성기를 보여주는 비디오만 제출하면 된다. 이 대회 주최자로 알려진 제시 레빗은 이 대회는 단순히 사이즈(size) 작은 페니스 (penis)를 비교해 가릴 뿐만 아니라 참가자의 자신감과 용기도 평가한다고 주장했다는데 모름지기 마땅히 고추의 매운맛 강도(强度)와 밀도(密度) 내지 밀도(蜜度)와 당도(糖度)의 지구력(持久力)이 크기 사이즈나 뭣보다 중요하다는 의미(意味)였으리라.

 

청소년 시절 내가 사춘기(思春期) , 조숙(早熟)했었는지 조로(早老)했었는지 몰라도, 일찍 맞은 사추기(思秋期)에 서울 동대문 밖 보문동과 창신동 사이에 있던 채석장 돌산에 올라 백운택이란 경복고등학교 친구랑 밤이 깊도록 부르던 가곡 이별의 노래’(박목월 시 김성태 곡) 후렴 가사 그대로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인데 문득 이우걸 시인의 기러기1’이 떠오른다.

 

죽은 아이의 옷을 태우는

저녁

머리칼 뜯으며 울던

어머니가 날아간다.

비워서 비워서 시린

저 하늘 한복판으로

 

이 시를 장석주 시인은 다음과 같이 표주(標註)한다.

 

소멸은 물물(物物) 세계에서 필연이니, 먼저 죽고 나중에 죽는 것이 대단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자식 앞세운 부모는 숨이 붙어 있다고 산 게 아니다. 이 부모의 아픔을 참척이라고 하는데, 그 고통과 비통함이 얼마만 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는 짐작조차 어렵다. 죽은 아이의 옷을 태우는 저녁은 흘러가 버린 지 오래다. 제 머리칼 뜯으며 울던 어미도 떠난 지 오래다. 온 것은 기어코 가는 것이다. 가는 것을 붙잡을 수는 없다. 지금 있는 것은 비워서 비워서 시린 하늘과 그 한가운데를 떠가는 기러기 떼다. 인생 허허롭다.”

 

여행기는 여행자가 아니고 여행자에 대한 것(A traveler’s writings say more about the traveler than about the place traveled)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글이나 그림도 그렇다고 할 수 있으리라. 글이고 그림이고 읽어 줄 독자나 봐 줄 사람을 위해 쓰고 그리는 것 같지만 실은 단 한 사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에 틀림없어라.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으랴. 설혹 많은 사람이 같은 글이나 그림을 읽고 본다고 해도 각기 다른 글을 읽고 다른 그림을 보게 마련이다. 그들 자신이 각자의 그리움을 각자의 글과 그림으로 그리듯이 말이다.

 

그러니 글을 쓰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고독한 작업이고 외로운 순례의 길이리라. 우리 모두 이 세상에 혼자 왔다가 혼자 떠난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고 각자는 각자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살다 우리 모두의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여정(旅程)이리. 그것도 시간과 공간과 현상(現象)을 초월한 여정이리.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알껍데기를 깨고 허물을 벗어 새나 매미 또는 나비처럼 비상(飛翔)하는 것이리라.

 

그 한 예로 수명(壽命)이 인간과 비슷하다는 솔개의 삶을 좀 살펴보리라. 솔개는 새 중 수명이 길어 70~80년을 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힘든 과정이 있다. 솔개가 40년 정도 살게 되면 부리는 구부러지고 발톱은 닳아서 무뎌지고 날개는 무거워져 날기도 힘들어진다. 이 시기에 솔개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게 지내다가 죽느냐? 아니면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새롭게 살 것이냐?

 

고통을 선택한 솔개는 바위산으로 날아가 먼저 자신의 부리로 바위를 마구 쪼아댄다. 쪼고 쪼아서 낡고 구부러진 부리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러면 닳아 없어진 부리 자리에서 새 부리가 자란다. 그리고 새로 나온 부리로 자신의 발톱을 하나씩 뽑기 시작한다. 그렇게 낡은 발톱을 다 뽑아버려야 새 발톱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선 새 깃털이 나도록 무거워진 낡은 깃털을 하나씩 전부 다 뽑아버린다.

 

이렇게 고통스런 시련(試鍊/試練)을 극복하며 130여 일이 지나야 솔개는 새로운 40년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일월성신(日月星辰)

천지신명(天地神明)

간절히 빌고 또 비나이다.

현재 코로나바이러스로

시련을 겪고 있는 인류도

고차원적(高次元的)으로

승화(昇華) 환골탈태(換骨奪胎),

새로운 인류 코스미안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기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코리아헤럴드 기자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전명희 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3.29 11:52 수정 2020.09.14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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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