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인곡(人曲) ‘아리랑’부터 불러보리(III)

이태상

 


교향곡 한국()’을 작곡한 폴란드의 대표적 작곡가 크시스토프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 1933-2020)2020329(현지시간) 향년 86세로 타계했다.

 

악보에는 적혀있지 않지만 ‘Korean’이라 불린 그의 교향곡 5(Symphony No. 5)’은 일본으로부터 한국의 해방 50주년을 기해 국제 한국 문화 협회(The International Cultural Society of Korea)의 위촉을 받아 작곡된 것으로 1992년 작곡가의 지휘로 The Korean Radio Symphony Orchestra가 초연했다.

 

이 곡은 1991년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이 “(펜데레츠키의) ‘히로시마를 위한 애가(Polish: Tren Ofiarom Hiroszimy, English: Threnody for the Victims of Hiroshima, 1960)’를 듣고 이 세계적 작곡가가 일본을 위한 곡만 쓰고 한국을 위한 곡은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일본 강점기 등 오랜 역사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한국인의 진혼곡(鎭魂曲)을 써달라는 요청을 해서 우리 민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모티브를 반복적으로 쓴 한국() Korean’이 작곡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작곡가 펜데레츠키 자신이 이 교향곡 5에 대해 한 말이다.

 

그 누가 내 교향곡 작품들을 쓰잘데기 없는 성전(聖殿)’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리라. 난 세상을 구()하라는 유혹을 오래전에 뿌리쳤노라고. 나는 다만 인간적이고 예술적인 차원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보존하려고 애쓸 뿐이다. (If someone had the idea of calling my symphonic works ‘cathedrals of uselessness,’ they should know that I gave up the world-saving temptation long ago. I am keen, however, to save the things which are the most important to me in the artistic and human dimensions.)”

 

나 또한 세계평화 같은 거창한 꿈을 오래전에 버렸지만 가까운 이웃 나라, 그것도 왕실을 비롯해서 백제인의 후손들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인과의 선린(善隣)관계를 맺는데 일조가 될 수 없을까 해서 한일 아리랑 별곡(別曲)’ 하나 불러보리라.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으라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천추 아니 만추의 한()이 된 이야기다.

 

1970년 직장업무로 일본에 출장 갔다가 일을 다 보고 하루 이틀 틈이 나서 당시 열리고 있던 오사카 엑스포를 관람한 후 유서 깊은 교토와 나라로 향했다. 신간센 급행열차를 타고 역에 내려 역 앞 광장에서 두리번거리다 마침 내 옆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있는 아가씨에게 내 서툰 일본어로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잠깐만 기다리라며 자기가 기다리던 언니 되는 사람과 몇 마디 주고받은 다음 언니를 보내고 나서 아가씨가 자청해서 일일 관광 안내를 해주겠단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했던가. 뜻밖에 아리따운 아가씨의 이런 호의를 어찌 사양하고 거절할 수 있으랴. 마치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황홀하도록 달콤한 하루가 순식간에 저물 무렵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할까, 자기 집으로 저녁초대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언제 친구들을 불러 모았는지 혼자 사는 자기 집에서 다 함께 깔깔대며 화기애애(和氣靄靄)하게 저녁식사 후 밤늦게 기차역 플랫폼까지 전송을 받고 우리는 헤어졌다. 밤 기차로 동경에 도착, 다음 날 아침 하네다 공항에서 나는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할 때까지 나는 일본 아가씨가 헤어지면서 내게 건네준 종이쪽지를 손에 꼭 쥔 채 무진히 고민했다. 아가씨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이 쪽지를 어쩔 것인가? 꿈꾸듯 아가씨와 하루를 같이 지내면서도 나는 처자식이 있는 기혼자라는 사실을 아가씨에게 밝히지 못했다. 아가씨가 물어보지도 않는데 말하기도 그렇고, 또 한편으로는 잠재 의식적으로 내가 미혼자 싱글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미치도록 안타깝고 후회막심(後悔莫甚)의 유감천만(遺憾千萬)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지 않아도 2년 전 서울에서 나는 신문기자직을 버리고 해심(海心)’아린 이색주점(異色酒店) 대폿집을 차려 친구 손님, 손님 친구들과 취생몽생(醉生夢生)하다가 어는 날 밤 만취 상태에서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데이트도 한 번 안 해본 아가씨와 하룻밤을 지낸 뒤 도의적인 책임을 진답시고 그 아가씨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결혼했으나 서로 맞지 않아 가정이 불화(不和)하면서도 애들 때문에 마지못해 살고있는 형편과 처지였었다.

 

그러니 내가 어쩔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과민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 아가씨는 그냥 단지 내게 친절을 베풀어줬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 아니면 영 아니다. Now or Never’이고 전유(全有) 아니면 전무(全無) All or Nothing’이지 다른 선택이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 나는 일본 아가씨가 준 종이쪽지를 찢어버리고 말았다. 나를 한시바삐 잊게 해주는, 아가씨를 위한 최선책이라고 합리화시켜 나 자신을 달래면서. 지나고 돌이켜 보니 일본 아가씨를 위해서는 최선이었을는지 몰라도 나 자신을 위해서는 최악의 결단이었는지 알 수 없어라.

 

그런 후 결혼한 지 3년도 못 돼 우리 부부는 성격의 상충은 물론 가치관의 상치로 합의이혼을 하고 보니 아내가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할 수 없이 애들을 위해서라도 더 노력해보겠다고 18년을 더 정말 초인적으로 기를 쓰고 애를 써본 끝에 두 번째로 이혼, 처음 결혼한 지 20여 년 만에 다시 헤어지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영웅전 위인전 등을 탐독하고 마음의 샘터같은 책에 나오는 세계명언들을 딸딸 외우면서 나 자신을 당위성(當爲性), 독일어론 ‘sollen,’ 영어로는 ‘ought to be’에 끼워 맞추려고 엄청나게 억지를 많이 써온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to be or not to be’라고 독백했다지만 인생 80여 년 살아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내가 왜 진작 실존적(實存的)’으로 살지 못했을까 한()스러울 뿐이다. 영어로는 ‘to be,’ 독일어론 ‘sein,’ 그래, 그렇지, ‘not to be’하지 말고 생긴 대로, 가슴 뛰는 대로 살아봤어야 할 일이었다. 하룻밤 아니 한순간 같이 지낸다 해도 찰나(刹那)이면 찰나인 대로 만리장성을 쌓아 볼 일이었으리라.

 

얼마 전 친구로부터 전달된 이메일 하나 나눠보리라.

 

어느 젊은 남녀가 결혼하여 신혼생활 한 달여 만에 남편이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장에 징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일단 징용이 되면 그 성() 쌓는 일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죠. 안부 정도는 인편을 통해서 알 수야 있겠지만, 부역장에 한 번 들어가면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 신혼부부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부인은 아직 아이도 없는 터이라 혼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을 부역장에 보낸 여인이 외롭게 살고 있는 외딴집에 어느 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찾아 들었었죠. 남편의 나이쯤 되어 보이는 사내 한 사람이 싸리문을 들어서며 갈 길은 먼데 날은 이미 저물었고 이 근처에 인가라고는 이 집밖에 없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으니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주십시오하고 정중하게 간청을 했죠. 여인네가 혼자 살기 때문에 과객을 받을 수가 없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주변에는 산세가 험하고 인가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사내가 말을 걸었죠. “보아하니 이 외딴집에 혼자 살고있는 듯한데 사연이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남편이 부역가게 된 그동안의 사정을 말해주었죠. 밤이 깊어가자 사내는 노골적인 수작을 걸었고,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여인과 실랑이가 거듭되자 더욱 안달이 났었죠.

 

이렇게 살다 죽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대가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을 생각해서 정조를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직 우리는 너무 젊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의 평생을 책임질 테니 나와 함께 멀리 도망가서 행복하게 같이 삽시다.”

 

사내는 별별 수단으로 여인을 꼬드기기 시작했었죠. 하지만 여인은 냉랭했습니다. 사내는 그럴수록 열이 나서 저돌적으로 달려들었고, 여인의 판단은 깊은 야밤에 인적이 없는 이 외딴집에서 자기 혼자서 절개를 지키겠다고 저항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여인은 일단 사내의 뜻을 받아들여 몸을 허락하겠다고 말한 뒤, 한 가지 부탁을 들어 달라고 조건을 걸었었죠. 귀가 번쩍 뜨인 사내는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테니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남편에게는 결혼식을 올리고 잠시라도 함께 산 부부간의 의리가 있으니 그냥 당신을 따라나설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새로 지은 남편의 옷을 한 벌 싸드릴 테니 날이 밝는 대로 제 남편을 찾아가서 갈아입을 수 있도록 전해 주시고 그 증표로 글 한 장만 받아주십시오. 어차피 살아서 만나기 힘든 남편에게 수의(壽衣)를 마련해주는 기분으로 옷이라도 한 벌 지어 입히고 나면 당신을 따라나선다고 해도 마음이 좀 홀가분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제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저는 평생을 당신을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그 약속을 먼저 해주신다면 제 몸을 허락하겠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마음씨 또한 가상한지라 좋은 여인을 얻게 되었노라 쾌재 부르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덤벼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욕정을 채운 후 곯아떨어졌죠. 사내는 아침이 되어 흔드는 기척에 단잠을 깨었죠.

 

밝은 아침에 보니 젊고 절세의 미모에다 고운 얼굴에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니 양귀비와 같이 천하 미색이었죠. 사내는 저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 수 있다는 황홀감에 빠져서 간밤의 피로도 잊고 벌떡 일어나서 어제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길 떠날 채비를 했고, 여인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장롱 속의 새 옷 한 벌을 꺼내 보자기에 싸더니 괴나리봇짐에 챙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내 마음은 이제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와서 평생을 해로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걸었었죠.

 

드디어 부역장에 도착하여 감독관에게 면회를 신청하면서 옷을 갈아입히고 글 한 장을 받아 가야 한다는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감독관이 옷을 갈아입히려면 공사장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한 사람이 작업장을 나오면 그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옷을 갈아입을 동안 당신이 잠시 교대를 해 줘야 가능하다고 말하자 사내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고 여인의 남편을 만난 사내는 관리가 시킨 대로 대신 들어가고 그에게 옷 보따리를 건네주었죠. 남편이 옷을 갈아입으려고 보자기를 펼치자 옷 속에서 편지가 떨어졌습니다.

 

당신의 아내 해옥입니다. 당신을 공사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옷을 전한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와 하룻밤 같이 자게 된 것을 두고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시면 이 옷을 갈아입는 즉시 제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시고 혹시라도 그럴 마음이 없거나 허물을 탓하려거든 그 남자와 교대해서 공사장 안으로 돌아가십시오.”

 

자신을 부역장에서 빼내 주기 위해서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다고 고백을 듣지만 그것을 용서하고 아내와 오순도순 사는 것이 낫지, 어느 바보가 평생 못 나올지도 모르는 만리장성 공사장에 다시 들어가서 교대를 해주겠는가? 남편은 옷을 갈아입고 그 길로 아내에게 달려와서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랍니다. 이거야말로 하룻밤을 자고 만리장성을 다 쌓은 것이 아닙니까? 하고 많은 인간사(人間事)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이 나 대신 만리장성을 쌓아준다면 다행한 일이겠지만, 어리석은 그 사내처럼 잠시의 영욕에 눈이 어두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만리장성을 영원히 쌓아주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요!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코리아헤럴드 기자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전명희 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3.31 11:24 수정 2020.09.14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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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