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인생은 호스피스, 아니 놀이터

이태상

 


현재 전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역병 코로나바이러스는 1947년 출간된,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알배르 카뮈 (Albert Camu 1913-1960)의 소설 '페스트(The Plague)가 사실적으로 예시한 바가 있다.

 

카뮈는 프랑스 영토인 알제리 북부 도시 오랑을 덮친 재앙으로 페스트를 지목했다. 도저히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없는 재앙, 페스트. 인간들은 페스트의 한복판에서 비극적이며 부조리한 세계를 절감하는 한편, 그 속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고,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고뇌한다. 카뮈는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속에 이 역병을 앓고 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이 역병에 면역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Everyone has it inside himself, this plague, because no one in the world, no one, is immune.)”

 

몇 년 전 발생한 코메르스(코리안 메르스) 사태 이전부터 한국에선 마스크가 새로운 패션으로 자리 잡아 흰색, 검은색, 녹색에 파란색까지 어울린 마스크들의 행진에 그 기이한 풍경을 외국 언론은 놓치지 않았다. 허핑톤 포스트는 이런 대한민국의 모습을 화보로 엮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서양 사람들의 행태에 비한다면 양반이다. 비근한 예로 동양인이 개고기를 먹는다고 야만인이라고 흉보면서도 서양인들은 예수의 상징이란 양의 양고기를 즐겨 먹는다. 내가 보기에 '고기는 고기'일 뿐이다. 소고기, 돼지고기, 물고기, 예수의 살과 피를 섞었다는 빵과 포도주 등 가릴 것 없다.

 

개가 맹인안내견, 반려견, 애완견, 폭발물 탐지견, 범인이나 실종자 탐색견, 사냥개, 군견과 경찰견 등등, 인류에게 지대한 공헌을 해오고 있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야생의 이리나 늑대가 길들여져 인간의 충복으로 구차한 목숨을 부지해오고 있는, 마치 거세당한 내시 같은 신세가 몹시 딱하고 안쓰러울 뿐이다.

 

이것이 어디 개뿐이던가. 이 개 같은 세상에서 개 같이 살고 있는 개 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서양에서 남자들이 개 목줄 매듯이 넥타이를 매기 시작하면서, 제가 속한 조직과 기관에 구속되어 숨통 막히는 신앙이다 이념이다 사상이다 온갖 허깨비 같은 주의 주장과 신앙심이다 애국심이다 애사심이다 하는 속박에 묶인 노예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어디 그뿐인가. 여성의 경우엔 더 혹독한 족쇄를 발에 채워오고 있지 않나. 마치 가축처럼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 가둬 두기 위해 옛날 중국 계집애들의 발이 자라지 못하도록 어려서부터 꽁꽁 묶어 놓았듯이 서양에서는 중세 시대 십자군 시절 정조대로 여성의 성기에 자물쇠를 채웠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성의 성노리개 패션 명품이란 마네킹으로 남성에게 예속시켜오고 있다. 미스코리아, 미스월드, 미스유니버스니 하는 상품 레벨까지 붙여서 '뇌색녀' 아닌 '골빈녀'를 전 세계적으로 각국마다 대량으로 생산해오고 있다.

 

, 그래서였을까. 얼마 전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 1969 -)의 남편 장례식에 참석한 1,700여 명의 조문객 가운데 넥타이를 맨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버드대학 출신으로 미국 재무장관 비서실, 구글, 페이스북 성공신화를 써온 그녀에게 남편이 러닝머신에서 쓰러져 숨지자 데이브(Dave)가 생전에 넥타이를 싫어했기 때문에 넥타이 없는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데이브는 그녀의 남편이자 론치 미디어 설립자 겸 서베이몽키 최고 경영자 데이비드 브루스 골드버그(David Bruce Goldberg, the founer of LAUNCH Media and the CEO of SurveyMonkey 1967-2015)를 지칭한 것이다.

 

2006년 뉴욕에서 치러진 백남준(1932-2006)의 장례식에선 존 레논의 부인 오노 요코(Yoko Ono 1933 - )를 비롯한 400여 명의 참석자들이 옆자리에 앉은 조문객의 넥타이를 자르는 깜짝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는 1960년대 백남준이 독일에서 작품 발표를 하다 갑자기 청중석에 앉아 있던 그의 스승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의 넥타이를 잘라 스승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Free Spirit)'의 새로운 시대를 연 역사적인 퍼포먼스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백남준의 영향 때문인지 베르린에는 특이한 규칙이 있는 사교 클럽이 있는데, 중년층이 주요 고객인 이 클럽에서 남자들은 넥타이를 착용해야 하는 것이 그 첫 번째 규칙이고, 여성에게만 주어진 파트너 선택권을 가진 여자가 마음에 드는 남성을 발견, 가위로 싹둑 넥타이를 자르면 그 남자는 무조건 춤 (내지 추측컨대 베드까지) 파트너가 돼야 하는 게 그 두 번째 규칙이란다. 따라서 이 클럽은 여성 손님들로 대호황이라던가.

 

그렇지 않아도 첨단기술과 결합한 성(sex)과 영화 속 사랑이 우리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인공지능-가상현실-통신혁명이 결합해 육체적 파트너 없이 성적 욕구 해소가 상용화되고 있지 않은가. 센서 칩을 통해 실제와 유사하게 만지고 느끼는 감각 구현에 박차를 가해 특정 부위 크기 조절 약물까지 개발되고 있다는 보도다. 그리고 유전자를 물려준 부모가 여럿인 아기와 낳아준 부모보다 일찍 수정된 아기 등 복잡 다양한 상황 발생이 예고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처럼 현실보다 더 매력적인 사이버 연인이 가능해진 세상에서 구태의연하게 시대착오적인 로봇화된 남자와 여자로 도태되지 않으려면 어서 모든 남성은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모든 여성은 하이힐을 하이킥으로 걷어차 버리고 사람으로 돌아가 짧다면 눈 깜빡할 사이처럼 짧은 인생살이 사람답게 살아볼 일 아닌가. 더 이상 개 같이 살지 말고 말이어라.

 

그게 불가능하다면, 개보다는 차라리 고양이를 닮아 보는 건 어떨까. 여기서 우리 이병률 시인의 시 '고양이가 울었다'를 음미해보리라.

 

고양이 한 마리가 동네 골목에 살았다. 검은 비닐봉지와 살았다. 검은 봉지 부풀면 그것에 기대어 잠들었고 검은 봉지 위로 빗물이 떨어지면 그것을 핥아먹으며 살았다. 어느 날 검은 봉지가 사라졌다. 바람에 날리기도 하였을 것이고 누군가가 주워가기도 하였을 것이나 아주 어려서부터 기대온 검은 봉지를 잃은 고양이는 온 동네를 찾아 헤매다 죽을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검은 봉지를 형제 삼아 지내온 날들. 고양이가 울었다. 잠든 형제를 위해 자꾸 자리를 비켜주던 날들, 뼛속으로 뼛속까지 바람이 불었다.

 

이 시를 장석주 시인은 이렇게 풀이한다.

 

"만일 사람이 고양이라면 저마다 '검은 비닐봉지'와 같은 무엇을 갖고 산다고 할 수 있다. 돈이건 권력이건, 우정이건 우매한 자기 확신이건. 혹은 신앙이건 예술이건! 사람은 본질에서 고독하고 불안하고 무기력하기에 기댈 만한 무언가를 구한다. '검은 비닐봉지'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인간적 욕망과 환상이 투사되면 장미 꽃봉오리나 무지개로, 목숨이나 신앙으로 변한다. 그걸 잃으면 정신줄을 놓고 죽을 것처럼 아프기도 할 것이다."

 

하기는 사람이 개만큼이라도 됐으면 좋으리라. 미국의 유머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이 갈파했듯이 '굶주린 개에게 먹이를 주면 개는 너를 물지 않는다. 이것이 개와 인간의 차이점이다. (If you pick a starving dog and make him prosperous, he will not bite you. This is the principal difference between a dog and a man)" 이 말을 우리 인간들은 잊지 말아야 하리라.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4.07 10:30 수정 2020.04.07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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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