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자유와 사랑이 일치하려면

이태상

대한민국의 음악 전문 방송국 엠넷에서 방영하는 음악 프로그램 너목보’(너의 목소리가 보여)에서 나는 최근에야 9시간 20분 최장시간 노래로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국악인 김주리씨의 절창 하늘이여를 시청했다. 우리 한민족 아니 온 인류의 레퀴엠(Requiem) 진혼곡(鎭魂曲)이라 할 수 있으리라.

 

199867일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가 미국 윌리엄스대학을 졸업하는 내 처조카의 졸업식에서 그의 첼로 연주도 겸한 축사를 했다.

 

하나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것이 음악을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각자의 삶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 요요마의 축사가, 다시 말해, 너의 목소리가 네 삶이고, 너의 삶이 네 예술이라는 그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수화(手話)를 하는 나의 동료인 법정통역 에디(Eddie)를 보노라면 그에게 빨려든다. 손으로만 하는 게 아니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채롭고 다양한 얼굴표정과 몸짓으로 그의 온몸 세포 조직 하나하나가 모두 춤추듯 황홀하게 움직이는 것이 너무도 매혹적이다. 법정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동료들과 구화(口話)로 대화할 때도 온몸을 미친 듯 흔들면서 웃어 젖히는 그를 나는 미친 에디(Crazy Eddie)’라고 부른다.

 

미쳐야 미친다고 하듯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각자 제가 하는 일에 미친듯이 열중하여 온 심혈을 쏟아부을 때 최고의 걸작이 만들어지고, 하는 사람 자신부터 무아지경(無我之境)에 이르는, 그야말로 입신지경(入神之境)에 도달하게 되리라.

 

명품이나 명기란 말도 있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우리 모두 명인(名人)’ ‘달인(達 人)’이 될 수 있지 않으랴. 그것도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원무궁토록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단 하나뿐인 존재로 말이다. 그러자면 악기와도 같은 우리 몸부터 잘 갈고 닦아야겠지만, 이 몸을 연주하는 우리 마음을 풀무질로 혼불을 피울 때 우리 각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땅을 내려다보는 넋두리가 아닌 하늘을 향한 넋소리가 되리라.

 

가수 김추자의 노래 거짓말이야가 사회 불신 조장을 이유로 금지곡 처분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몇 년 전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간통죄가 위헌이라는 72의 결정을 내렸다. “혼인과 가정의 유지는 자유로운 의지와 애정에 맡겨야지 타율적으로 강제할 수 없다는 다수의 의견에 반해 간통죄목의 위헌판결은 혼인과 가족 공동체의 해체를 촉진시킬 수 있으며 가정 내 약자와 자녀의 인권과 복리 침해가 우려된다는 것이 소수의 의견이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그 당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과 결부시켜 사상의 자유는 안 되고 성의 자유는 되는 거냐?”는 비판도 나왔었다. 그동안 세계에서 간통죄가 남은 나라가 이슬람 국가 말고는 한국뿐이었었는데 한국인만이 그때까지 성적 자기 결정권을 무시당한 채 법의 통제를 받아왔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또 한 편으로는 전 세계에서 1억 권 이상 팔린 원작을 4천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Fifty Shades of Grey)’26천만 달러를 거둬들였고 한국에서도 현실도피냐, 아니면 가정폭력을 부추기는 여성비하냐의 논란을 불러일으켰었다.

 

, 이쯤해서 진지하게 생각 좀 해보자. 사랑이 내용이고 결혼은 그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면 모든 사상과 이념 그리고 모든 사회나 국가제도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하자면 사랑이나 사상이 새와 같은 것이라면 어떤 형식이나 제도도 새장과 같다고 해야 하리라.

 

일부일처이든 다부일처이든 일부다처이든 또는 다부다처이든 결혼제도의 유래가 일종의 소유제도에서 비롯한 것 아니었던가. 어디 그뿐인가.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개인주의, 전체주의 등 뭐라고 명명하고 일컫든 간에 그 이상과 현실은 천양지차 아니던가. 예수와 석가모니, 그 밖의 모든 성인 현자들이 다 공산주의자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었나. 민심이 천심이어야 할 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에서도 있는 자가 이요 없는 자가 이 되는 현실이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이름의 옷만 입었을 뿐, 지배라는 구조와 제도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더 좀 생각해보면 어느 사회 어느 국가에서든 사회구성원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같이 다 불완전한데 어떻게 우리 국가와 사회제도만 완벽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어렸을 적 읽은 동화 하나가 생각난다.

 

옛날 옛적 어느 나라 임금님이 다가오는 자신의 생일잔치를 위해 백성들한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대궐 안에 놓인 큰 술독에 포도주를 한 병씩 갖다 부으라 했더니 다들 나 한 사람쯤 포도주가 아닌 물을 갖다 붓든 누가 알랴며 술독을 물로 채운 것을 보고, 임금님은 다음 해 생일 때까지 가장 아름다운 화초를 키워오는 사람에겐 큰 상을 내리겠다며 꽃씨 한 봉지씩 나눠주셨다.

 

때가 되자 궁궐 안 뜰은 온갖 아름답고 예쁜 화초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드디어 임금님이 화초들을 하나씩 감상하면서 뜰 안을 거닐다가 아무 화초도 없는 화분 앞에서 울고 서 있는 한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왜 우느냐고 물으셨다. 그랬더니 그 아이 대답이 임금님께서 주신 꽃씨를 심어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물을 주며 애썼지만, 꽃은커녕 이파리조차 나지 않더라고 했다. 그래서 큰 벌을 받게 되었다고 더 크게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임금님이 밝히셨다. 백성이 하도 거짓말만 하고 사는 것 같아 백성을 깨우치려고 애초에 죽은 꽃씨를 나눠주었었노라고. 그러고는 이 아이에게 큰 상을 주셨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나 우리 각자가 남이 아닌 나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끝없이 내 사랑과 내 정신부터 지극정성으로 가꾸고 키워 볼 일이어라. 이럴 때 비로소 이상과 현실이, 자유와 사랑이,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지상낙원이 도래하리라.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4.12 11:55 수정 2020.04.12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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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