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음악 전문 방송국 엠넷에서 방영하는 음악 프로그램 ‘너목보’(너의 목소리가 보여)에서 나는 최근에야 9시간 20분 최장시간 노래로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국악인 김주리씨의 절창 ‘하늘이여’를 시청했다. 우리 한민족 아니 온 인류의 레퀴엠(Requiem) 진혼곡(鎭魂曲)이라 할 수 있으리라.
1998년 6월 7일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가 미국 윌리엄스대학을 졸업하는 내 처조카의 졸업식에서 그의 첼로 연주도 겸한 축사를 했다.
“하나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것이 음악을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각자의 삶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 요요마의 축사가, 다시 말해, 너의 목소리가 네 삶이고, 너의 삶이 네 예술이라는 그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수화(手話)를 하는 나의 동료인 법정통역 에디(Eddie)를 보노라면 그에게 빨려든다. 손으로만 하는 게 아니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채롭고 다양한 얼굴표정과 몸짓으로 그의 온몸 세포 조직 하나하나가 모두 춤추듯 황홀하게 움직이는 것이 너무도 매혹적이다. 법정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동료들과 구화(口話)로 대화할 때도 온몸을 미친 듯 흔들면서 웃어 젖히는 그를 나는 ‘미친 에디(Crazy Eddie)’라고 부른다.
‘미쳐야 미친다’고 하듯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각자 제가 하는 일에 미친듯이 열중하여 온 심혈을 쏟아부을 때 최고의 걸작이 만들어지고, 하는 사람 자신부터 무아지경(無我之境)에 이르는, 그야말로 입신지경(入神之境)에 도달하게 되리라.
명품이나 명기란 말도 있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우리 모두 ‘명인(名人)’ ‘달인(達 人)’이 될 수 있지 않으랴. 그것도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원무궁토록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단 하나뿐인 존재로 말이다. 그러자면 악기와도 같은 우리 몸부터 잘 갈고 닦아야겠지만, 이 몸을 연주하는 우리 마음을 풀무질로 혼불을 피울 때 우리 각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땅을 내려다보는 넋두리가 아닌 하늘을 향한 ‘넋소리’가 되리라.
가수 김추자의 노래 ‘거짓말이야’가 사회 불신 조장을 이유로 금지곡 처분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몇 년 전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간통죄가 위헌이라는 7대2의 결정을 내렸다. “혼인과 가정의 유지는 자유로운 의지와 애정에 맡겨야지 타율적으로 강제할 수 없다”는 다수의 의견에 반해 간통죄목의 위헌판결은 “혼인과 가족 공동체의 해체를 촉진시킬 수 있으며 가정 내 약자와 자녀의 인권과 복리 침해가 우려된다”는 것이 소수의 의견이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그 당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과 결부시켜 “사상의 자유는 안 되고 성의 자유는 되는 거냐?”는 비판도 나왔었다. 그동안 세계에서 간통죄가 남은 나라가 이슬람 국가 말고는 한국뿐이었었는데 한국인만이 그때까지 ‘성적 자기 결정권’을 무시당한 채 법의 통제를 받아왔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또 한 편으로는 전 세계에서 1억 권 이상 팔린 원작을 4천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Fifty Shades of Grey)’는 2억 6천만 달러를 거둬들였고 한국에서도 현실도피냐, 아니면 가정폭력을 부추기는 여성비하냐의 논란을 불러일으켰었다.
자, 이쯤해서 진지하게 생각 좀 해보자. 사랑이 내용이고 결혼은 그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면 모든 사상과 이념 그리고 모든 사회나 국가제도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하자면 사랑이나 사상이 새와 같은 것이라면 어떤 형식이나 제도도 새장과 같다고 해야 하리라.
일부일처이든 다부일처이든 일부다처이든 또는 다부다처이든 결혼제도의 유래가 일종의 소유제도에서 비롯한 것 아니었던가. 어디 그뿐인가.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개인주의, 전체주의 등 뭐라고 명명하고 일컫든 간에 그 이상과 현실은 천양지차 아니던가. 예수와 석가모니, 그 밖의 모든 성인 현자들이 다 공산주의자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었나. 민심이 천심이어야 할 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에서도 있는 자가 ‘갑’이요 없는 자가 ‘을’이 되는 현실이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이름의 옷만 입었을 뿐, 지배라는 구조와 제도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더 좀 생각해보면 어느 사회 어느 국가에서든 사회구성원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같이 다 불완전한데 어떻게 우리 국가와 사회제도만 완벽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어렸을 적 읽은 동화 하나가 생각난다.
옛날 옛적 어느 나라 임금님이 다가오는 자신의 생일잔치를 위해 백성들한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대궐 안에 놓인 큰 술독에 포도주를 한 병씩 갖다 부으라 했더니 다들 나 한 사람쯤 포도주가 아닌 물을 갖다 붓든 누가 알랴며 술독을 물로 채운 것을 보고, 임금님은 다음 해 생일 때까지 가장 아름다운 화초를 키워오는 사람에겐 큰 상을 내리겠다며 꽃씨 한 봉지씩 나눠주셨다.
때가 되자 궁궐 안 뜰은 온갖 아름답고 예쁜 화초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드디어 임금님이 화초들을 하나씩 감상하면서 뜰 안을 거닐다가 아무 화초도 없는 화분 앞에서 울고 서 있는 한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왜 우느냐고 물으셨다. 그랬더니 그 아이 대답이 임금님께서 주신 꽃씨를 심어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물을 주며 애썼지만, 꽃은커녕 이파리조차 나지 않더라고 했다. 그래서 큰 벌을 받게 되었다고 더 크게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임금님이 밝히셨다. 백성이 하도 거짓말만 하고 사는 것 같아 백성을 깨우치려고 애초에 죽은 꽃씨를 나눠주었었노라고. 그러고는 이 아이에게 큰 상을 주셨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나 우리 각자가 남이 아닌 나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끝없이 내 사랑과 내 정신부터 지극정성으로 가꾸고 키워 볼 일이어라. 이럴 때 비로소 이상과 현실이, 자유와 사랑이,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지상낙원이 도래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