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어느 봄날, 청솔 숲길 따라 지리산문 절집에 들다

제4부 나 홀로 찾고 싶은 피아골 연곡사에는 아름다운 승탑이 있다

여계봉 선임기자


섬진강을 따라 달리는 승용차는 만개한 벚꽃 터널 사이를 달리다가 외곡 삼거리에서 피아골 골짜기 속으로 한참을 들어간다. 피아골은 지리산 노고단과 반야봉 사이에 있는 계곡이다.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진 산길을 따라 몇 굽이를 지났을까. 불무장등 능선이 피아골로 내려서는 끝자락에 작은 절집 연곡사가 있다.

 

통일신라 때 연기조사가 처음 절의 터를 잡을 적에 물이 소용돌이치는 연못에서 제비들이 노는 것을 보고 연곡사(鷰谷寺)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단청은 하염없이 빛바래 나무의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전각의 늙은 처마는 질박한 멋이 돋보이고, 법당을 오르는 돌계단은 검버섯 핀 할아버지 피부처럼 이끼를 안고 있고, 세월의 무게감이 돋보이는 고색창연함이 곳곳에 서려있으며 오랜 세월 긴긴 홍진을 견디고 곱게 늙어가는 절집이 참 아름답다. 그러나 연곡사는 유감스럽게도 이런 복을 타고 나지 못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꾸밈과 치레가 없는 작은 절집이 나온다.



주변은 조용하고 오로지 산새 소리만이 우리를 반긴다. 연곡사의 흥망성쇠는 우리 역사의 굴곡과 일치한다. 연곡사는 임진, 정유년의 왜란과 구한말 의병활동, 6.25전쟁을 전후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버리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예전에 비해 쇠락한 연곡사가 안쓰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금의 연곡사는 찾아오는 이들에게 안식과 명상을 선사하고 있다. 대가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더라면 상상할 수 없었을 평화로움을 작은 연곡사는 주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부처가 진정 바라던 모습일지도 모른다.


피아골 순국 위령비.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에서 산화한 스님과 군경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작년에 세워졌다.

 


연곡사는 화엄사와 함께 지리산에 가장 먼저 들어선 절로 꼽힌다. 통일신라 때 창건되었고 고려 초까지 선()을 닦는 사찰로 이름이 드높았으며 지금은 비구니 참선 도량이다. 옹기종기 자리 잡은 장독대와 부처께 공양 올리는 스님들 모습에서 비구니 사찰 특유의 섬세하고 정갈함이 느껴진다.


삼홍루(三紅樓) 오르는 계단. 벚꽃터널을 지나면 전각들이 모여서 따뜻한 봄볕을 쬐고 있다.



연곡사는 역사의 서러운 그늘이 서려있어 그런지 저 만치 홀로 피어있는 꽃처럼 쓸쓸하고 단아하다. 절집이 소박한 민들레처럼 하늘하늘 작고 아련해서 그저 손만 대도 더운 숨을 뿜으며 으스러져버릴 것만 같다. 하늘 아래 작거나 낮지 않은 게 어디 있으랴. 하늘 아래 헛것 아닌 게 무엇이랴. 전각의 번다한 치장은 절집을 찾는 사람들 마음을 시리게 만든다. 색즉시공이거늘 유한한 물질의 허장성세로 무엇을 도모하려는 것일까.


대적광전(大寂光殿). 화엄경의 교주 비로나자불(毘盧遮那佛)을 모신 연곡사의 본전이다.

 


연곡사는 승탑의 보물창고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탑이 많은 곳이다. 대적광전 뒤쪽에는 국보와 보물인 승탑들을 둘러보는 연곡사 국보순례길이 있다. 순례라고 하지만 600m 남짓 되는 짧은 산책로다. 작은 오솔길에서 산책을 즐기다 보면 승탑들과 자연히 만나게 된다. 연곡사의 승탑을 볼 때마다 천 년 전 옛사람들의 돌 다루는 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아름다운 승탑을 조각하던 석공은 누구였을까? 어떤 불심이 이런 승탑을 만들게 하였을까?

 

왜적이 불을 질러 소실된 연곡사는 사명대사의 제자인 소요대사가 중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소요대사승탑은 형태와 꾸밈이 소박하지만, 각 부분의 비례에서 오는 균형미와 기품이 느껴진다. 8각의 탑신은 한 면만 문비형(門扉形)이고 나머지 면에는 신장상(神將像)을 볼록하게 조각하였다. 옥개석은 조각 방식이 생략되어 밋밋해 보이지만 귀퉁이의 귀꽃이 눈길을 끈다.

 

소요대사탑(보물 제 154호). 탑 몸체에 탑의 주인과 연대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현각선사탑비(보물 제152호). 탑의 몸체가 사라지고 머리 부분만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동승탑 남서쪽에 위치한 동승탑비는 몸체인 비신은 사라지고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받침돌은 적갈색, 머릿돌은 암갈색으로 돌의 재질도 다르며, 떨어져 나간 머리는 다시 붙여 놓았는데 불에 탄 흔적이 있다.


동승탑비(보물 제 153호). 탑의 몸체가 사라지고 머리 부분만 남아 탑의 주인공과 만든 연대를 알 수 없다.

 


승탑 중에서도 가장 압권이 동승탑이다. 가장 동쪽에 있는 동승탑은 전체 높이가 3.5m, 지대석 폭 1.75m 내외로 연곡사에 있는 3기의 승탑 중 가장 정교하다. 비례와 균형, 그리고 섬세한 조각이 드러내는 미적 감각에서 탄성을 금할 수 없다. 승탑에는 구름 속의 용과 포효하는 사자, 가릉빈가와 사천왕상, 불법을 지키는 팔부신중이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다.

일제 때 동경대학으로 반출될 위기가 있었으나 다행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승탑(국보제 53호). 탑비가 사라져서 탑의 주인공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도선국사 승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승탑 북쪽에 있는 북승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동승탑과 흡사한 모습이다. 북승탑 역시 누구의 승탑인지 모른다. 옆에 있어야할 탑 주인공의 비석인 탑비가 사라져버려 안타깝게도 탑의 주인공과 만든 연대를 알 수 없다. 동승탑을 모방하여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여지며, 현각선사(玄覺禪師) 승탑으로 추정된다.


북승탑(국보제 54호). 동승탑과 만든 연대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승탑을 타고 내 마음 흔드는 산바람은 고요한 절집 풍경에 소리를 만들다. ()란 말씀 언()과 절 사()자가 만난 말이다. 그래서 절에는 시가 있다. 절은 한 권의 시집이다. 그런데 연곡사는 유난히 시정(詩情)이 흘러넘친다. 남 몰래 감춰두었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서 읽고 싶은 시집처럼 연곡사도 감춰두었다가 나 홀로 찾고 싶은 그런 절집이다.

 

일주문 옆 찻집 벤치에 앉아 따뜻한 봄볕을 얼마나 쬐었던가. 그러나 계속 연곡사에 더 머무를 수는 없는 법. 피안(彼岸)을 나와 피아골 삼홍소로 가기 위해 직전마을로 올라간다.


도인 반야의 전설이 담긴 반야봉이 연곡사를 자애롭게 내려다보고 있다.

 

 

찻집 연우. 이름도 예쁘지만 야외에서 마시는 이 집 차 맛은 일품이다.

 

 

'직전(稷田)''기장 밭'이란 뜻이다. 기장은 쌀, 보리, , 콩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오곡(五穀)으로 치는 곡식이다. 연곡사 수백 명의 승려가 식량이 부족했던 옛적에 척박한 토양에도 잘 자라는 기장을 심어 배고픔을 달랬다는 데서 '피밭골'이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피아골'로 이름이 굳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명은 피아골이요 마을 이름은 한자음을 써서 '직전(稷田)'마을이다. 이런 유래를 알기 전이라면 누구나 피아골이라는 말에서 얼핏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참혹함'을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직전마을에서 피아골 삼홍소까지는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오솔길과 오르내리막이 있는 산길 2.2km를 걷게 되는데, 왕복 두 시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다.

직전마을이 끝나는 곳. 삼홍소, 피아골대피소를 거쳐 지리산 주능선 임걸령까지 갈 수 있다.
피아골 표고막터. 이름 그대로 표고버섯을 재배하던 곳으로 지금은 생태계 복원 중이다.


표고막터를 지나면 굵은 돌이 깔린 산길이 계속된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발걸음은 갈수록 무거워진다. 완급이 반복되고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몇 구비의 길을 가다보면 몸은 고단해지지만 영혼은 맑아진다. 숨을 고르고 터벅터벅 걷다가 계곡에 걸려있는 철제다리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단풍이 한창인 어느 가을날, 이곳을 찾은 남명 조식 선생이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다고 예찬한 산홍(山䉺), 수홍(水䉺), 인홍(人䉺)의 피아골 삼홍소(三䉺沼).

 

신록의 계절에 만난 단풍 없는 삼홍소는 한낱 평범한 지리산 계곡일 뿐이다.

 


 

이 마을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이 깊은 곳에 어떤 사람들이 흘러들어와

마을을 만들었는지

나는 굳이 알려고는 하지 않는다

 

- 이성부 시집 <지리산> ‘피아골 다랑이논중에서 -

 

삶과 죽음의 그림자가 아른거린 계곡 피아골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끔찍한 상흔이 전설로 남아 추억하는 것조차 두렵게 느껴지는 곳

생사의 갈림길에서 피()()를 확실히 구분했던 아픈 상처를 갖고 있는 곳

 

양손 맞대어 물을 연거푸 얼굴에 끼얹지만 무심한 피아골 계곡물은 외곡 삼거리까지 흐르고 흘러 섬진강으로 들어간다.




 

여계봉 선임기자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4.21 12:40 수정 2020.04.21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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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