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어느 봄날, 청솔 숲길 따라 지리산문 절집에 들다

제5부 화개십리 따라가면 쌍계사가 있다

여계봉 선임기자

 


봄은 색으로 다가온다. 봄은 지리산 산자락에 벚꽃과 진달래로 채색한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놓았다.

 

김동리 소설 역마에서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는 시오리가 좋은 길이라 해도 굽이굽이 벌어진 물과 돌과 장려한 풍경은 언제 보아도 길 멀미를 내지 않게 하였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화사한 봄날에 쌍계사 가는 길은 꽃잎 날리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화개장터의 화개교에서 바라보니 멀리 지리산 주능선 아래에서 골짜기를 돌고 돌아 흘러온 화개천이 섬진강으로 스며든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입구까지 5에 이르는 화개십리 벚꽃길에는 수령 50년이 넘는 벚나무 가로수가 터널을 이룬다. 하얀 꽃길은 맑디맑은 화개천 물줄기와 어울리고, 산비탈에 터를 잡은 녹차 밭 마을과 조화를 이루면서 향기가 넘쳐난다. 환장할 만큼 아름다운 섬진강의 화개십리를 코로나19 때문에 드라이브 스루로 지나쳐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화개천 따라 절집 가는 길은 고단한 현실의 강을 너머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꽃길이다.



하동의 봄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화개천변 산비탈의 야생차밭이다. 오래된 야생차밭은 유난히 짙푸른 봄의 색을 펼쳐낸다. 화개는 섬진강과 화개천을 끼고 있어 안개가 많고 습도가 높으며 차 생산 시기에는 밤낮의 기온차가 커 차나무재배에 적합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다랑논에 이랑과 골을 이루며 펼쳐지는 녹차 밭의 가지런한 조형미는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정갈해진다.

 

하동군 화개면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녹차를 재배한 시배지로 알려져 있다.

 


 

쌍계사 입구 상가에서 모퉁이를 돌면 속계와 법계를 가르는 일주문 역할을 하는 돌문이 나오는데, 양쪽 바위에는 쌍계(雙磎)석문(石門)이 새겨져 있다. 절 이름 '쌍계(雙溪)'는 쌍계사 양쪽을 타고 내리는 두 계곡물이 절 아래서 만나 화개천을 이루는 데서 나왔다. ‘쌍계의 시내 ''자는 흔히 라고 쓰는데 하동 쌍계사만 같은 뜻의 자를 쓴다.


‘雙磎’와 ‘石門’은 신라의 최치원이 철지팡이로 쓴 철장서(鐵杖書)라고 한다.

 


 

쌍계사 초입에는 솔숲이 펼쳐져 있다. 늙은 소나무들이 춤을 추듯 늘어서 있다. 쌍계사는 명성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경사진 지형을 감안해 가람배치가 조밀하고 단아하다. 울창한 숲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가니 삼신산 쌍계사(三神山 雙溪寺)라 쓰인 다포계 팔작지붕을 한 일주문이 화려함을 뽐낸다. 삼신(三神)이란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 세 영험한 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라 성덕왕 때 대비, 삼법 두 화상이 중국 선종의 6조 혜능의 두개골을 갖고 돌아왔는데 꿈에 "삼신산 눈 속 칡꽃 핀 곳에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화려한 팔작지붕의 일주문. 앞의 돌다리는 절집 바깥에 있다고 해서 외청교라고 부른다.

 


 

쌍계사는 언덕에 자리해 단계별로 축대를 쌓고 단마다 문과 전각을 차례로 앉혔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일직선으로 올라가는 구조이고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세문을 모두 지닌 드문 절이다.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욕심()도 노여움()도 어리석음()도 덜어낸다.

 

절집은 한적하고 고요하다. 암자를 둘러싼 대숲은 한결 더 푸르다. 따스한 봄기운에 새들의 노랫가락도 경쾌하다. 곧게 솟은 적송은 위엄을 과시하고 붉게 핀 진달래가 수줍게 미소 짓는다. 저물녘 범종 소리 울릴 때 꽃잎마저 비처럼 흩날린다면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절집 밖 사람들은 대나무 숲과 녹차 밭, 벚꽂을 쌍계사 삼보라고 부른다.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때 창건했지만 큰 절로 일으켜 세운 중흥주는 문성왕 때 진감선사 혜소다. 진감선사는 중국에서 불교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팔영루(八詠樓)를 지은 뒤 이곳에서 우리 민족 정서에 맞는 불교 의식음악 범패를 만들었다. 팔영루는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짜리 이층 누각으로 오랜 세월 동안 범패 명인들을 가르치고 배출하는 교육장 역할을 하였다.



팔영루는 부처나 보살을 봉안하지 않은 ​곳이어서 공포를 꾸미지 않은 민도리 방식이다.​



불가에서 선()이란 무엇인가. 참선을 통해 본래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성품이 부처의 성품임을 깨달으면 곧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개혁의 신지식이었던 진감선사의 선종(禪宗)은 민중들에게는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였다. 더는 짓눌리지 않으리라. 출신과 신분은 각각 달라도 깨우치면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희망이 되겠는가.

 

여느 절 같으면 대웅전 계단 아래 공간에 석탑이 하나 또는 둘이 서 있기 마련이지만 쌍계사에는 탑 대신 전체 높이가 3.63m 승탑비가 1,100년 살아낸 세월만큼 기품 넘치는 모습으로 서 있다. 절 입구나 주변에 있어야 할 승탑비가 대웅전 앞 절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의아스럽기는 하다.


탑비의 주인은 쌍계사 중흥주인 통일신라 말 명승 진감선사 혜소다. 최치원이 그의 일대기와 업적을 검정 대리석판에 해서체 글씨 2417자를 빼곡히 새겨 넣은 비석은 비신은 많이 마모되고 깨져 보조 철틀로 모양을 유지하고 있지만 아래 거북 모양 받침대 귀부, 중간 비 몸돌, 맨 위 장식 이수가 온전히 남아 있다. 절 이름이 원래 옥천사였는데 신라 정강왕이 진감선사의 탑비를 세우면서 근처에 이름이 같은 절이 있어서 쌍계사라는 새 절 이름을 내린 것이 오늘에 이른다.

 

국보 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 1200년을 헤아린다는 화개 차의 역사도 이 탑비에 새겨져 있다.

 

 

대웅전 옆에 핀 홍매화가 검은색 기와지붕에 봄기운을 전해준다. 대웅전 들어서는 계단 옆에는 괘불 걸어 세우는 돌 지주 한 쌍이 서 있다. 쌍계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본전답게 위엄이 넘친다.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인조 때 벽암선사가 다시 세우고 여러 차례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른다.


대웅전은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으로 된 다포식 팔작지붕집이다.​

 

 

대웅전 오른쪽 낮은 담 앞에서 천년 고려 마애불을 만난다. 큰 바위에 불상을 새겼는데 두 손을 소맷부리에 넣고 단전으로 다소곳이 끌어 모아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는 모양새다. 자비롭다기보다 천진난만 인상이다. 걱정 없이 잘 자란 부잣집 막내 도련님 같기도 하고 세상을 초연한 스님 같기도 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끌리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고려 마애불은 비록 지방 문화재이지만 숱한 쌍계사 문화재 가운데 가장 정감 넘치는 불상이다.

 

 

대웅전 뒷마당에는 금강계단이 있다. 장방형 돌 울타리를 두른 안에 지대석을 깔아 만든 이중 기단 가운데 석종 모양의 사리탑이 있다. 전각이 아닌 계단(戒壇)을 지어 사리와 정골을 봉안했다.​​ 고산 스님이 스리랑카에서 가져왔다는 진신 사리를 1990년 구층석탑 지어 모신 뒤 이곳에도 나눠 봉안했다고 하는데 계단 네 모퉁이에 사천왕상을 새겼다. ​​​



우리 불교 최초 금강계단인 통도사 대웅전 뒤 금강계단을 본떠서 만들었다.

 

 

고려 마애삼존상. 금강계단 뒤 언덕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 보살상을 새겼다.

 


 

쌍계사는 크게 두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경내의 주축을 이루는 일주문, 천왕문, 팔영루, 대웅전에 이르는 영역과 계곡을 사이에 두고 108계단을 올라가 만나게 되는 금당영역이 그것이다. 금당영역에 들어서자 팔작지붕을 한 팔상전이 있다. 팔상전 옆으로 난 또 하나의 계단을 올라서면 금당이 자리하고 있다. 금당(金堂)은 고대 가람의 중심 건물을 이르는데 대개는 대웅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쌍계사에는 따로 대웅전이 있어서 또 다른 중심 전각이라는 뜻으로 금당이라는 용어를 쓴 듯하다.금당 안에는 불상 대신 육조혜능의 두개골을 모신 7층 석탑이 세워져있다.



육조정상탑이 있는 금당은 쌍계사의 근원이다.

 

 

진감선사가 쌍계사를 중창할 당시, 지배층의 왜곡으로 불교는 그 본래의 뜻과 빛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문자에 어둡고 삶이 무거운 민중들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희망이 되었던 선풍(禪風)을 진작시킨 진감선사는 중국에서 차()의 종자를 들여와 쌍계사 주위에 심고 선불교를 부흥시킨다.

 

천여 년 전 당대의 승려 조주(趙州)선사가 던진 선종의 화두 차나 마셔라(喫茶去)’.

진감선사와 초의선사가 추구했던 다선일미(茶禪一味).

이들이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각양각색의 돌이 모여서 만들어진 돌담에도 禪의 가르침이 담겨있다.



찾는 이 드문 절집 뒤에도 봄이 무르익고 있다. 국사암에서 금당으로 내려오는 흙길에는 비로 쓴 자국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빗자루 지나간 자리에는 마음의 티끌을 쓸어내는 수행자의 간절한 속마음이 남아있다.


길을 쓸어내린 것은 빗자루만이 아니다. 대 그림자 또한 길을 쓸고 있다.

 

 

여계봉 선임기자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4.24 12:02 수정 2020.04.24 18:37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편집부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